[연중 제4주일 / 은은한 행복]
언젠가 자매님들한테 언제 가장 기쁘고 행복했었냐고 물어보았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한 자매님이 조용히 “애 날 때요!” 그러셨다. 그래서 다른 자매님들한테도 “동감하시나요?”하고 여쭙자 모두들 웃으면서 그렇다고 하셨다. 이번엔 형제님들한테 “형제님들은 언제가 가장 기쁘고 행복했습니까?”하고 물어보았더니 물음이 끝나자마자 “장가 갈 때요!”하고 어느 형제님이 소리치셨다. 모두들 한바탕 웃고 난 후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지금도 자식들 덕분에 행복하시나요?”
“아따, 신부님은 장가 안가 애들 없응께 그 속 모르신다요. 때론 자식이 아니라 왠수일 때도 있어라!” “그럼 결혼생활은 어떠세요? 아직도 좋으세요?” 그러자 형제님들은 대부분 웃으면서 “그저 그러지요” 하며 대충 얼버무리는데 한 자매님이 “에이 신부님. 뭐가 좋다요. 그냥 헐수 없이 의무로 살제.” 허걱!!!
세상에서 행복한 삶의 조건을 무엇으로 많은 사람들이 돈과 사회적 지위를 든다. 돈이 많아야 근심걱정 없어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게다. 하기사 돈만이 주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 이웃 형제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세상,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인 세상인데. 과연 그런 행복은 영원할까?
다시 신자들한테 세례성사 받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보니 솔직히 좋은지 어쩐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행복하시요?” 하고 물으니 “그래도 지금이 행복하지요.” 웃으며 대답한다. 왜일까?
주님을 몰랐었다면 인생의 부조리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지냈을 것을, 주님을 알고 그분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느끼고 나니 더 이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그분을 몰랐다면 괴로움과 고통에 짓눌려 어쩌면 포기하고 지낼 인생이었을 것을, 그분 안에서는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솟아남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도 십자가 안에서 이겨낼 수 있기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그분과 함께 걸어온 지난 날 들과 현재의 내 삶을 되돌아보니 어느 순간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운다. 은은한 행복이 내 삶을 감싸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얻는 행복은 처음엔 강렬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퇴색해 버리는 반면, 그분 안에서 느끼는 삶의 행복은 처음엔 아무런 느낌도 없고 밋밋했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은은하게 밀려들어 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