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 하지만… " 이라고 말하지 마라
1986년 2월 5일
병원에서 치른 첫번째 장례식은 꽃 한 송이 없이 초라하고 가난하다. 한 형제의 친형을 묻었다.
가난뱅이와 떠돌이들 열댓 명이 그곳에 있었다. 가톨릭 구호단체, 피에르와 다른 형제들도 있었다.
주님이 교회로 들어오셔서 우리 모두를 팔로 감싸안으시는 것 같았다.
"행복하여라.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풍요로워진다."
잠시 후 1개월 된 갓난아기의 장례식이 미사 없이 진행되었다. 아기 어머니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나를 몹시 아프게 하지만, 이 아이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에르미타주 공동체에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믿지말고 나를 믿어라. 너희는 감춰진 보화처럼 너희 안에 나를 품고 있다.
나에게 너희 자신을 맡겨라.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하되 내게 의지해라."
공동체에서 성체성사 중
활짝 펼쳐진 그의 손에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거대한 빛줄기 같은 포근함이 우리를 완전히 적신다.
"내가 너희에게 사랑을 쏟아붓는다. 너희는 내 사랑 속에 잠기도록 해라.
빛이 있다고 해서 어려움이 녹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짊어진 십자가를 없애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이 빛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내 사랑을 믿어라."
"믿습니다. 예수님."
2월 22일
아브리에 소성당에서 나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프스산으로 스키 타러 갔다.
"나의 작은 종으로 남아 있거라. 내가 너와 함께 걸어가게 해라."
2월 23일
작은 성당 문이 닫혀 있어 나는 하얀 눈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은 왜 저를 항상 '작은 종'이라고 부르시나요?"
"네가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제 안에서 그 일을 하시는 분은 당신이 아닌가요?"
"그렇다. 그렇게 하도록 맡기거라."
2월 24일
눈으로 뒤덮인 길은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다.
"'작은 종'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세요."
"마리아를 닮거라. 성모님처럼 되어라."
"그게 전부인가요? 주님은 상당히 큰 희망을 갖고 계시는군요?
'작은'이라는 말이 긍정적인 것 같아요. 좀더 말씀해 주세요."
"내 마음의 작은 종이요 여왕이라."
얼마나 놀라운 계획인가! 이 말씀은 충격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일이면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리라.
2월 25일
나는 혼자 침묵 속에 잠겨 한 시간 동안 눈길을 걸었다.
그분이 '내 마음의 여왕' 이 무슨 뜻인지 말씀하신다.
"'작은 종' 과 '내 마음의 여왕' 이라니요?"
"네가 내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는 뜻이다. 네 말은 나를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께 어떤 것이라도 부탁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니콜, 그건 아니란다. 부탁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너를 통해 부탁한다는 것이다."
2월 26일 다시 길을 가며
빠르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본다. 여기저기 쌓인 눈덩이가 시냇물을 둘러싸고 있다.
"니콜, 작다는 것은 네가 바라보는 바로 그것이란다."
"시냇물이 빠르게 흘러가는군요."
"그래, 잘 보아라."
시냇가에 쌓인 눈이 흐르는 물을 가로막았다.
"니콜, 잘 알겠지. 작다는 건 네가 나를 거치도록 허심하는 것이란다. 나를 벗어나지 말아라.
나를 거쳐 흐르면 시냇물처럼 더 강해질 것이다."
주님은 내가 이 물을 깨끗하게 유지하길 바라시는 것 같았다.
그분은 물이 빠르게 흘러내리기를 지켜보시리라.
"당신은 맑은 시냇물과 그 힘을 사람들이 바라보기를 바라시는군요.
제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처럼 되기를 바라시나요?"
"그래."
"저도 그러길 바라지만 그럴 자격이 없어요."
"두고 보면 알게 되리라."
2월 27일
눈 쌓인 산길을 걸어가는데, 한순간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냇물이 멈춘 것처럼 네 자신을 감추어라. 내 안에 너를 감추어라."
"예수님, 당신은 제가 당신에게 힘을 얻어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시나요?"
"그래."
어느 작은 성당에서 그 지역 할머니 네 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할머니들은 각 처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차례로 응송했다.
공격적인 기도 속도에 현기증이 나면서 신경이 거슬렸다.
"할머니들은 당신께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도문을 줄줄 뱉어내고 있군요, 주님."
그분은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주님, 이 모든 어둠이 우울하기만 해요."
여전히 대답이 없다.
그러자 나는 내가 참으로 살아 계신 어떤 분과 함께 삶을 나누고 있기에
응석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십자가의 길은 내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다.
확실히 나는 귀여움을 받고 있다.
마치 커다란 성탄 선물을 가득 안고 있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선물이 너무 커서 조금 불편을 느낄 정도다. 정말 일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3월 어느날 형제들에게 돌아와 소성당에서
주님이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지난번 우리 아이의 친구 엄마가 11년 동안 암과 투병하다가 열다섯 살 된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미사 때 주님이 기뻐하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아이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운데, 저보고 기뻐하라고요?"
"그래, 내 사랑어린 눈길 안에,
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날마다 너를 만들고 창조하는 내 시선 안에서 기뻐하여라."
3월 4일
그분은 기뻐하라고 다시 말씀하신다. 그분과 함께, 그분으로 살아가며 행복해하라고.
"투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제시하는 살아 있는 유대다. 그 관계는 이론적이지 않다.
3월 6 - 7일
멀린 캐로더스의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를 읽고 있다.
이 책은 매우 미국적이며 조금은 유치하다. 이 책에서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것이
나를 괴롭히지만 나는 여전히 주님께 그렇게 말씀드린다.
"내게는 고맙다는 표현 하나하나가 모두 고유하다."
"주님, 저는 당신 손에 박힌 못 때문에 당신께 '감사하다'고 단순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설명해 주세요, 주님."
"다른 방식으로 알려주겠다."
"지금 알려주세요."
"나는 모든 것과 함께 있다. 니콜, '동시에 함께' 있단다. 병원에서 암과 싸우고 있는 질, 로레트와
정신질환 치료를 받고 있는 그의 아이, 마르틴과 점점 움츠러드는 그녀의 남편.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들과 함께 울고 있다. 그래, 니콜. 그들과 함께 아파하여라.
이 모든 것을 통해 내가 현존하고 있다고, 내가 항상 함께 있다고 말해주어라."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이러한 신앙 고백을 암흑 속에서 해야 하는군요."
"연민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라. 내 자리를 남겨두어라. 내가 너와 함께 아파하게 하라.
나 또한 그곳에 있다."
주님과 나눈 영적 대화
「두려워 말라 너는 내 사람」에서
니콜 고스롱 지음/ 김수진 옮김/ 바오로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