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강론.묵상

[스크랩] 해 지는 언덕에서

도구 Ludovicus 2007. 12. 29. 05:06

      해 지는 언덕에서 송년에 즈음하여 입속에서 맴도는 말은 '주님, 감사합니다'이다. 잘 살아내지는 못했어도 안녕히 살 수 있었음에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살아 있다는 것이 꼭 죽음의 반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는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그로 인한 기쁨·아픔·행복·불행·즐거움· 번뇌·삶과 죽음은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다. 사는 순간순간이 생의 기쁨일 때도 죽음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아픔, 행복보다는 불행, 즐거움보다는 번뇌, 삶보다는 죽음의 부피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돌아보매, 개인적으로 일이 많은 한 해를 살았다. 갑상선 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았고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그 시간들이 마치 한줄기 강물처럼 마음의 골을 타고 한 해의 끝에서 흘러내린다. 지난 여름 피정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예수회원으로서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랑의 삶을 살고 싶어서 수도자가 되었지만 그 뜻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한 삶이었다. 사랑은 자신을 낮추는 일이라고 입으로는 수없이 되뇌이면서도 끝내 낮추지 못한 오만의 순간들이 가슴에 화인이 되어 아픔으로 남았지만, 생명을 주시고 수도회로 이끄시고 사제로 불러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위로받았다. 해지는 언덕의 저녁놀은 찬란한 슬픔으로 다가오고 나의 삶 또한 지는 해만큼이나 슬프고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휘청거린 삶이었다. 부끄러움으로 절로 고개 숙여지지만 그것마저도 그분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적지 않은 해를 살아내고서도 마음의 어리석음으로 아직 삶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지만 하늘과 땅, 나아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자연의 순리를 생각하면서 모든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연스런 마음이 되고자 노력한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썩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사람은 욕심을 썩히지 않고는 사랑의 싹을 틔우지 못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욕심만 자라나 씨앗 뿌리고 땀 흘린 적 없는 빈 밭에서 열매를 거두려 했다. 평정심 잃은 마음은 늘 소란스러움에 시달렸고 이웃의 아픈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원목 사제로서 과연 환자들의 아픔을 얼마나이해하고 함께하는지 반성하면서 심히 부끄럽다. 늘 개인적인 욕심이 앞서 주님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한 해를 돌이켜보니 아픔의 자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보인다. 그래도 새날의 희망 등불을 켜두고 일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심을 고백하며 두 손을 모으고 싶다. 삶은 그분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등불을 밝혀야 하듯 영적인 등불을 켜지 못한다면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찾지 못한다. 어둠을 밝힌 영혼의 등불을 켜들고 선으로 이끄시는 그분께 의지하며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고 싶다. 사는 동안 눈물로 지새우는 밤을 어찌 다 헤아리며 시시때때로 맛보는 절망감은 또 어찌 다 헤아리랴. 하지만 그마저도 그분이 주신 생명의 삶이니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해 지는 언덕에서 잠시 고요 속에 머물며 내일 다시 떠오를 해를 묵상한다. 희망을 기다리며 사랑노래 부른다. 해 지는 언덕에서 살아 있음을 생각합니다. 마음속 메아리는 강물이 되어 지난 일 년의 골을 타고 흐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낮추는 일 수없이 되뇌었으나 끝끝내 낮추지 못한 순간들은 가슴에 화인으로 남았습니다. 님의 크신 사랑은 지는 해만큼 아름다운 슬픈 노래입니다. 지는 낙엽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사랑의 싹 틔울 수 있음을 알면서도 뿌린 씨 없이 흘린 땀 없이 열매만 탐했습니다. 고요가 떠나간 마음은 장터 같아 이웃의 아픈 소리 듣지 못하고 님의 소리에도 귀먹었습니다. 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롯이 마음을 모아야 하건만 마음은 늘 세상일에 빼앗겼습니다. 사람은 내일을 기대하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님뿐 인생은 님을 찾아 떠나는 긴 여정입니다. 어둠 속을 밝힐 영혼의 등불 켜들겠습니다.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고 절망의 늪에 빠질지라도 인생은 님이 주신 크나큰 선물입니다. 해 지는 언덕에서 내일을 노래합니다. 사랑노래 부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네」에서 류해욱 신부 지음 / 바오로딸 펴냄

      출처 :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글쓴이 : 개인날 오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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