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중제4주간금요일(100205.금)
<연중 제4주간 금요일>(2010. 2. 5. 금)(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세례자 요한의 죽음>
2월 5일의 복음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죽는 장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삶과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그런 죽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루카 11,49).“
신부로 사는 것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것을 불평하거나, 편한 삶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신부로 살겠다고 서원한 것은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다면 신부로 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신부로 살겠다면 편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신자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불평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함은 불공평한 일을 겪는다고 느낄 때 생깁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들은 다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어떤 신부는 도시 본당으로만 발령을 받고
어떤 신부는 시골 본당으로만 발령을 받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공평하고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불공평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신부의 삶은 도시나 시골이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서품 받을 때 무조건 순명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어떤 신자는 하느님의 은총과 복을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신자는 계속 시련과 고통만 겪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불공평하거나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복이 정말 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고통과 시련이 사실은 더 큰 은총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예언자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첫 번째 사명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면 예언자들은 박해를 받지 않겠지만
사실은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죽게 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회개를 거부했고,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그들 부부는 탄핵이라도 해서 그 자리에서 쫓아냈어야 합니다.
그들 부부는 사적으로 간통죄를 지었다는 것 말고도
정치인으로서도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당연히 쫓아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언자에게는 그런 죄인들을 비판할 의무가 있습니다. 죽음을 당하더라도.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다고 해서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다는 것은 예언자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권한은 없습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권한이 아닙니다.
회개는 강제로 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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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들은 이 사회의 억울함과 불공평함을 참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고통과 시련을 참고 견디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세금을 냈는데도 정부에서 지역 차별을 한다면
당연히 정부를 비판해야 하고 정권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 억울함을 참을 이유가 없습니다.
법과 제도가 잘못되어서 억울한 사람들이 생긴다면
그런 법과 제도는 바꿔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사인 규명을 하는 위원회가 있습니다.
과거에 정말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타살인데 자살이라고 하고, 간첩이 아닌데 간첩이라고 하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도 많고...
그런 일들을 신앙인들이 참고 견딜 이유가 없습니다.
단순히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불공평함과 억울함을 참기만 한다면
그것은 죄와 악을 방관하고 조장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신부들이 정치 문제에 개입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주교 신부이면서 공직을 맡고 정치 활동을 한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만일에 있었다면 모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했을 것입니다.
사제단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애쓰는 것이 정치 개입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독재자를 암살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정의를 위해서 싸우라고 가르칩니다.
독재자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
먼저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 다음에는 투표를 통해서 물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탄핵을 하든지, 시위를 하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냥 억울한 죽음을 참고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승리한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천벌을 받아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3.1 운동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왜 미련하게 만세만 불렀느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폭력 저항은 칼과 총을 이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은 침묵을 지키거나 굴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려고 할 때 그것에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은 죄입니다.
세상이란 원래 불공평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죄입니다.
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기다리지만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안에 숨어서 기도만 하는 것이 성직자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유태인들이 학살당할 때, 그때 교회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때의 일을 공식 사죄했습니다.
교회에, 신앙인들에게,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인 힘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권력도 무력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기도회를 주최하는 정도입니다.
그런 일들마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그건 신앙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란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박해를 받고 죽어야 한다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의 운명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따르겠다고 세례를 받았고 신자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뒤를 따르려거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죄에 물든 사람들이 불공평한 세상으로 만들었고,
말 없는 다수가 침묵을 지키면서 그것을 방관하고 동조했습니다.
우리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례자 요한의 뒤를 따르는 일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세례자 요한처럼 죽게 된다면, 예수님처럼 죽게 된다면
죽는 것입니다.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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