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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주간토요일(100130.토)

도구 Ludovicus 2010. 1. 30. 09:48

<연중 제3주간 토요일>(2010. 1. 30. 토)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힘든 건 힘든 거다>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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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갑니다.

거센 돌풍과 파도로 배가 가라앉을 것 같은 상황이 됩니다.

제자들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우성인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호수가 고요해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새로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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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요나서를 보면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요나서 1장을 보면 큰 폭풍으로 배가 거의 부서질 지경이 됩니다.

선원들이 겁에 질려서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아주 태평스러운 모습으로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선장이 요나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6)

 

돌풍과 파도로 배가 가라앉고 있는 상황입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걸 가지고 제자들을 탓할 것은 없습니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힘든 건 힘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믿음이 없냐고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믿음’일까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안 죽고 살게 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요나서에서 선장이 요나를 비난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죽게 되면 다 죽을 텐데 왜 너만 자고 있느냐?

너도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해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바로 요나서에 나오는 선장의 태도였습니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 왜 스승님은 혼자서 태평스럽게 주무십니까?

일어나서 우리와 함께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살려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함께 살아날 방도를 찾도록 하자고 깨운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8장에 나오는 같은 이야기에서는

‘주님, 구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지만,

내용과 뜻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약한 것을 꾸짖으십니다.)

 

자, 그럼, 제자들이 꾸중을 듣지 않을 정도로 믿음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게 되었을까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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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에 급속도로 성장할 것 같던 교회가

유대인들의 박해로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시작으로 사도들이 죽거나 잡혀 가고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교회가 망할 것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때 사도들은 아마도 호수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겁에 질려 있는데도 주무시던 예수님.

그리고 믿음이 없다고 제자들을 꾸짖으시던 예수님.

그때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사도들은 다시 힘과 용기를 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행전 5,41-42)

 

이것이 믿음이 없을 때와 믿음이 있을 때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박해 자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아도 꺾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가 선교활동을 하다가 잡혀서 매질을 심하게 당하고

감옥에 갇혀서 재판을 기다리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사도행전 16,25)

 

바오로와 실라스는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위기를 겪을 수 있고,

힘들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힘든 건 힘든 겁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크게 구별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무서워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힘들어도 주저앉지 않습니다. 바로 그 차이입니다.

 

‘자살’이 큰 죄가 되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 외에도

믿음과 희망을 잃고 스스로 포기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살아나려고, 한 번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애를 쓰다가 그냥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을 때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자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 번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력의 결실을 얻고 못 얻는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 부딪쳐보기는 해야 합니다.

 

“죽을 것처럼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믿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시고 살려주실 것이다,“ 라는 말은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인간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계신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뿐이다.”

 

배가 돌풍과 파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그런데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무서워도 참고 견디면서 계속 노를 젓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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