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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주일(100124)

도구 Ludovicus 2010. 1. 24. 11:00

<연중 제3주일>(2010. 1. 24.)

 

<예수님께서 해방을 선포하시다>

 

광야에서의 사십 일 단식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을 거쳐 고향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의 구절들을 인용해서 메시아 시대를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서의 첫 번째 선포입니다.

 

그 선포의 핵심은 ‘해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바로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해방.

가난에서, 온갖 병고에서, 그 밖의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방.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루카 24,47)

 

첫 번째 선포와 마지막 선포를 연결하면,

“해방을 얻기 위해서는(해방되고 싶다면) 회개해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 해방을 선언했을 때,

일부 노예들은 해방을 거부하고 주인 밑에 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생긴 자유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살던 곳을 떠나서 혼자 힘으로 먹고사는 일이 겁이 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비제도를 폐지했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도로서의 노비는 없앨 수 있었지만

긴 세월 노비로 살아온 삶 자체를 없애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유와 해방은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생각해봅니다.

흥부는 가난에 억눌려 있었고, 놀부는 욕심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흥부의 해방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놀부의 해방은 욕심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 감옥이 더 사람을 비참하게 할까요?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흥부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놀부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흥부보다는 놀부를 선택할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라디오에서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구연 동화식으로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은근히 재미있었고, 청취율도 높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 지역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흥부와 놀부 이야기의 청취 거부 운동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착했던 흥부는 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70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의 그 대학생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자녀들을 가르치고 있을까요?

아니면 흥부로 살았어야 했는데... 라고 말하면서 후회하고 있을까요?

 

흥부가 가난하게 된 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놀부가 재산을 독차지하고 흥부를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놀부의 욕심은 그 자신에게도 하나의 감옥이 되었고

동생을 가난이라는 고통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니 놀부가 욕심을 버리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됩니다.

욕심과 욕망이 집착을 낳고 집착이 여러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니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독재자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남의 자유를 뺏는 사람은 그 자신도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독재자가 권력 유지를 위해 사람들을 감옥에 가둘 때

그 자신도 욕망과 집착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해방을 위해 회개해야 할 사람은 바로 독재자입니다.

 

자유와 해방을 원한다면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긴 세월 도를 닦고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더 쉽고 더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를 닦고 수행하는 것으로는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산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재산 자체를 버려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그냥 도루묵이 되기가 쉬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되돌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집착을 집착으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일에 정치인이,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같은 질문을 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권력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 라고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정말로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정치를 잘 해라.’ 라고 하실까요?

그런데 이 말은 참으로 상투적인 말로(하나마나 한 소리로) 들립니다.

 

예수님이 권력을 버리라고 하실 때,

‘그러면 나라는 누가 다스립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권력이기 때문에 싸움이 생깁니다.

서로 버리려고 한다면... 정반대 상황이 되겠지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원한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버리는’ 일입니다.

욕심, 욕망, 집착을 버리는 일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그것이 어려우니 예수님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 자유를 얻기를 바란다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과 가르침에는 참된 자유의 길이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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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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