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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님공현후토요일(100109.토)

도구 Ludovicus 2010. 1. 9. 08:17

<주님 공현 후 토요일>(2010. 1. 9. 토)

 

<자아 소멸>

 

어제 강론에서 저는 네 개의 방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네 번째 방에 들어가는 것, 다시 말해서 믿음의 마지막 단계에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성인의 발뒤꿈치 근처에도 못가는 제가 감히 그 상태를 말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아 소멸’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속에 내가 완전히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다에 한 줌의 소금을 뿌린다고 바다가 변하겠습니까?

 

소금만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거대한 바다 속으로 한 줌의 소금이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 속으로 내가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다와 소금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때,

남아 있는 것은 바다뿐이고 소금은 사라집니다.

 

하느님과 내가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면

남아 있는 것은 하느님뿐이고 나는 사라집니다.

나의 자아는 소멸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을 빼면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는 상태.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말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토요일의 복음말씀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은 바로 자아 소멸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니 나는 없어지고 하느님만 남아 계시는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성인 성녀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분들이 성덕을 쌓아가는 과정이 바로 그 목표를 향한 노력입니다.

자신을 하느님 속으로 완전히 흡수시키고 소멸시키는 것.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너의 자아를 찾아라.” 라고.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의 말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사탄의 말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나’를 찾겠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떠난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의 장면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핵심은 ‘주인공’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조연으로 돌리고 스스로 주연이 되어라. 라는 유혹입니다.

 

(이 말의 주어를 바꿔서 “하느님이 당신의 아버지라면...” 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네가 유대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와 하나 되어서 사신 분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으니

그런 유혹은 간단하게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런 유혹에 시달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에서부터, ‘나’에게 하느님은 무엇인가? 까지.

 

하느님에게 있어서 나는 무엇인가? 를 묻지 않고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무엇인가? 를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유혹에 빠진 상태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은

하느님을 위해서 완전한 자아 소멸을 선택하신 말씀입니다.

 

옛날에 유행했던 노래 중에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그게 노래 제목이었는지 가사 중에 들어 있던 구절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하여간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노래였습니다.

 

만일에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서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불순한 의도로 하는 말이고

부모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말이 됩니다.

 

평생 자녀만을 위해서 살았던 부모들에게는

그 말이 너무나도 서운한 말이 될 것입니다.

 

중세기 때였나? 신본주의에 반발해서 인본주의를 주장했던 그 시대,

예술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결국 “신은 죽었다.” 라고 선언하는 철학자까지 등장했습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의 유혹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하느님을 항상 종 부리듯 부리려고만 하고

자기가 기도하면 무조건 그 기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고집부리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

전반부는 삭제하고 후반부만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 용서, 구원만 요구하는 주님의 기도,

그런 반 토막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신앙생활.

 

소금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바다에게 소금 속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

 

대중가요 가사를 보면 옛날에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았습니다.

너를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내용의...

 

그러나 요즘에는 아주 이기적인 내용의 노래가 나옵니다.

‘내가 바람 피워도 너는 바람피지 마.’ 라는 희한한 가사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모두 내어주는 일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아 소멸.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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