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주님공현후수요일(100106.수)
<주님 공현 후 수요일>(2010. 1. 6. 수)
<자연의 지배자이신 예수님>
월요일 복음 말씀은
질병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예수님을 소개했고,
화요일 복음 말씀은
굶주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수요일 복음 말씀은
자연의 지배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연의 지배자’이시라는 것은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은
마침 그때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러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그렇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가르치시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강론을 시작하면 항상 듣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연의 지배자시라면,
“왜 우리가 자연재해로 고통을 겪거나 죽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번에 서울을 비롯해서 여러 지역에서 폭설이 내렸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줄포에서 폭설을 겪었던 저에게는
이번 눈은 폭설도 아니고, 그냥 애들 장난입니다.
제가 줄포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첫 해 겨울이었습니다.
12월초부터 계속,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날마다 눈이 내렸고,
성당 마당에 어른 키보다 더 높이 눈이 쌓였습니다.
제설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여기저기 폭설로 완전히 고립된 마을이 많았습니다.
성탄절 준비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성탄절 이틀 전에야 겨우 눈이 멎었습니다.
정말 지독한 폭설이었고, 지역의 피해도 컸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번에 서울에 내린 눈은 폭설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난리가 난 것은 서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은 특별시니까? 웃기지도 않는 말입니다.
줄포에 폭설이 내렸을 때,
당국에서는 성당 앞을 지나가는 국도의 제설작업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이 각자의 농기계로 스스로 제설작업을 했습니다.
(철저하게 대도시 중심의 행정, 자동차 중심의 도로 관리...)
그해 여름에는 집중 호우를 겪었고, 겨울에는 폭설 피해를 겪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집중 호우도, 폭설도 천재보다는 인재의 측면이 컸다는 것,
사람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재해의 원인도 사실 인재의 성격이 더 컸지만,
피해 복구 작업이나 보상금 지급 문제 등으로 생기는 갈등,
소외감 같은 정신적인 상처들,
그게 더 큰 고통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자연재해를 겪으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원망하는 때가 많습니다.
물론 선량한 사람이 갑자기 목숨을 잃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를 왜 하느님 탓을 합니까?
하느님이 천벌을 내리신 것이라면 악인들만 골라서 벌을 내렸을 것입니다.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입니다. 자연재해는 천벌이 아닙니다.
늘 있었던 일이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일 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괴롭힌 것이 더 많습니다.
만일에 자연이라는 것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 항의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또 생각해보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할 존재인 인간들이
그 자연을 괴롭히고 파괴하고 정복하려고 하는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무슨 사건, 사고가 생길 때마다
하느님이 무심하다거나 무능력하다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말은 평소에 하느님을 믿지도 않던 사람들이 더 많이 합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라고 맡기신 것처럼
인간들에게 이 지구와 자연을 관리하라고 맡기셨다고 생각합니다.
관리인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아니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와 자연을 더 잘 가꾸고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서울이 눈 때문에 난리가 난 것은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인재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자연에 대해서 지배 권한을 갖고 계신다는 것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니 다스릴 권한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그 호수에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했습니다.
제자들은 맞바람 때문에 제대로 노를 젓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람과 파도 속에서 물 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립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에는 너무 놀라 넋을 잃어버립니다.
자연재해를 겪을 때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서 겁에 질립니다.
그러다가 자연마저도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게 되면
그 권능에 압도되어 넋을 잃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간사합니다.
완도 앞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 ‘모세의 기적’이라고 감동하고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다가
집중호우나 폭설을 얻어맞으면 금방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마치 철없는 아이들이 부모님에게서 생일 선물이라도 받으면 좋아하면서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마구 하다가
잔소리를 하고 야단치면 부모를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나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뿐입니다.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것을 두고 천벌을 받았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옛날에 피뢰침이라는 것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그걸 성당에 설치하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벼락이란 천벌인데, 감히 그것을 피하려고 하다니...
또는, 믿음이 있다면 그런 것 없어도 벼락을 피할 수 있다고 하거나...
성당이나 예배당마다 꼭대기에 피뢰침을 세우는 것은
천벌을 피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믿음이 없어서도 아니고,
‘벼락’이라는 자연 현상을 피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고 지혜입니다.
자연재해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노력은 인간의 몫입니다.
어차피 지구라는 이 작은 별은 늘 해왔던 것처럼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지진도 화산 폭발도 일으킬 것입니다.
그건 인간을 미워해서도 아니고 싫어해서도 아닙니다.
천벌도 아닙니다.
인간들은 더 많이 공부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온갖 잡신을 섬기고 굿을 하거나 제사를 바치면서
자연재해를 피하려고 애를 썼던 것은 무지에서 온 미신이었습니다.
과학을 좀 안다는 현대인들은 그런 미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연재해를 겪을 때 하느님 탓을 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자, 강론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은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연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자연을 지배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선량한 사람들의 경우는...
하느님에게 어떤 숨은 뜻이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우리 입장에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하여간에 지구라는 이 별에서 살고 있는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인간들은 자연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해야 하고,
어떤 자연 재난을 겪을 때 서로 돕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강론의 결론입니다.
에덴동산에도 비나 눈이 내렸을까요?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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