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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님공현후화요일(100105.화)

도구 Ludovicus 2010. 1. 5. 07:23

<주님 공현 후 화요일>(2010. 1. 5. 화)

 

<굶주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예수님>

 

월요일 복음 말씀은

사람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예수님을 보여주었고,

 

화요일 복음 말씀은

사람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고통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굶어본 적이 없다면

그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하는 고통입니다.

 

우리나라만 본다면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시대는 지난 것 같은데

있어도 ‘나눔’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못 먹는 사람들이 있고,

상대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배고픔의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배가 고픈 것은 고픈 것입니다.

 

그래서 굶주림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굶주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육체적인 굶주림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건 공산주의일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정신적인 배고픔에서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영적인 배고픔에서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2002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했던 말,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배고픔은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든 배고픔의 고통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입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은

그런 관점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다음에

광야에서 사십 년을 방랑할 때의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어서 민족이 전멸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민족 전멸을 막아준 비상식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군중을 먹인 이야기에는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프다고 투덜대거나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탈출기의 백성들은 배가 고프다고 항의했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했었지요.)

 

사람들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시선으로 군중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던’ 군중의 영적인 배고픔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배고픔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빵 다섯 개의 기적은

영적인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고,

육체적인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그 다음 목적이었습니다.

 

6.25 직후에 성당이나 예배당을 찾은 사람들 중 ‘일부’는

구호물자를 얻으려고, 즉 육체적인 배고픔 때문에 찾았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영적인 배고픔 때문에 성당이나 예배당을 찾습니다.

 

200여 년 전 처음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육체적인 배고픔이 아니라 영적인 배고픔과 갈증 때문에 찾았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이란 진리와 사랑과 구원과 영원함 등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건 육체적인 배고픔과는 차원이 다른 배고픔입니다.

 

빵 다섯 개의 기적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각자 가지고 있는 빵을 나눠먹었다는 해석이고,

또 하나는, 성경 기록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해석입니다.

 

전자의 해석은 사람들 마음을 사랑으로 변화시킨 기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고,

후자의 해석은 성경 기록 그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빵이 많아진 기적도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는 기적도 있었고...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이 한마음이 되고 사랑을 실천하게 된 것은 기적입니다.

그것도 분명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를 수천 명분으로 늘린,

그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기적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풀밭에 앉아서 음식을 나눠먹는 장면,

모두가 다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남았다는 설명에서

그 상황이 얼마나 풍요롭고 따뜻한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 식량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굶주리는 곳에서는 여전히 굶주리고 있습니다.

세계화, 국제화, 글로벌 시대...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관심 갖지 않고 배터지게 먹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느님은 ‘나’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굶주리는 사람에게 관심도 없고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는다면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군대 쫄병 시절, 식사 시간 때에 의무적으로 외치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밥을 먹기 전에 항상 외쳤던 그 구호는 “감사히 먹겠습니다.”였습니다.

 

‘누구에게’ 감사하는지는 각자 생각할 일이고,

자기가 먹는 음식이 당연한 권리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선물이고 은총이라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먹는 문제는 종교를 초월한 것입니다.

그건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것도 인류 공동의 생존입니다.

인간 세상은 약육강식의 짐승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빵 다섯 개를 수천 개 수만 개로 늘리는 기적만 행하셨다면,

그냥 그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그쳤다면,

사람들이 그 수천수만 개의 빵을 자기가 전부 갖겠다고 서로 다투었다면,

그건 기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빵 다섯 개의 기적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빵이 많아졌고, 예수님의 손에서 제자들에게로,

제자들 손에서 사람들에게로 나누어졌습니다.

 

아마도 사람들도 서로 서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배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눔’, 그것이 사랑입니다.

 

기적은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빵 다섯 개의 기적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사랑이 없었다면, 기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갑자기 많아진 빵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삼단 논법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 하느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다.

3. 그러므로 사랑은 기적을 행한다.

기적을 원한다면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따질지도 모릅니다.

“절대적으로 먹을 것이 부족하다면,

사랑만으로는 굶어죽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라고.

 

그럴 수도 있지요. 모두 함께 굶어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일부에게 먹을 것을 몰아주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만일에 엄마와 아기가 함께 그 자리에 있다면,

아기를 굶기고 엄마만 먹을까요?

아니, 아기를 먹이고 엄마가 굶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짐승 같은 약육강식의 세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 강자 하나와 그 추종자들만 남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거나 다 죽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빵 다섯 개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적으로 많아진 빵과 그것을 사랑으로 나눠먹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우리의 이상향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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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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