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주님공현전토요일(100102.토)
<주님 공현 전 토요일>(2010. 1. 2. 토)
“당신은 누구요?”
조직을 운영하는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가 ‘적재적소’입니다.
각 개인을 각자 능력이나 적성에 알맞은 위치에 배치했을 때,
그 조직은 살아서 움직이는 조직이 됩니다.
그러나 합당하지 않은 자리에 있게 되면,
원래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결국 조직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고,
남의 자리를 자꾸 탐냅니다.
무조건 높은 자리만, 더 권한이 센 자리만 원합니다.
대통령 그릇이 안 되는 자들이 개나 소나 다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고,
그런 자들 중에 어쩌다가 대통령이 된 자가 자기 말만 잘 듣는 사람을 뽑아서
장관 그릇이 안 되는 자들을 장관 자리에 앉히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속의 조직은 그런 식으로 이익이나 특권에 따라 움직이니
늘 그런 모습으로 자리다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달라야 합니다.
더 높은 자리가 더 많은 특권과 이익이 보장되는 자리가 아니고,
더 높은 자리일수록 더 많은 봉사를 해야 할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 관리를 위해서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지휘관, 참모, 사병 유형이 그것입니다.
학자로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훌륭한 성덕을 쌓던 사람이지만
공동체의 장상으로서는 전혀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하고 욕만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병 유형의 인물인데 억지로 지휘관 자리에 앉히면 그렇게 됩니다.
반대로 지휘관 유형의 인물에게 아무 권한도 책임도 맡기지 않으면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장상에게 반항이나 하면서 공동체를 흔들어놓습니다.
그건 단순히 자리 욕심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라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참모 유형의 인물은 장상에게 조언과 보좌를 잘하지만
권한과 책임을 맡기면 일을 잘 못하는 유형입니다.
공동체를 관리하는 사람은 구성원의 유형을 항상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손은 손이 하는 일을, 발은 발이 하는 일을 가장 잘하는 법입니다.
더 높은 자리가 더 좋고,
더 낮은 자리가 더 나쁜 자리라는 생각은 공동체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 말씀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자신을 밝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나 또는 엘리야 예언자로 믿고 싶어 했습니다.
만일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려고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자기는 구세주를 준비하는 사람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나중에 구세주이신 예수님에게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는 칭찬을 듣게 되는,
진짜 위대한 예언자였지만 자신은 전혀 그것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길을 닦는 사람일 뿐이라는 자의식,
그것이 요한의 위대한 점 중의 하나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참모 유형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참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한복음 1장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요한복음 3장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세속의 조직을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섬김의 의무가 커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군림’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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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다시 “매일미사” 책 ‘오늘의 묵상’이라는 글에 태클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매일미사 책 - “요한은 ‘요르단 강’에 들어가 씻기만 하면 죄가 용서된다고 외칩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요한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은 세례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또 그는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부르면서
먼저 행실로 회개를 표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표시로서의 세례였습니다.
물로 씻으면 자동적으로 죄가 용서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미사 책 - “하지만 요한은 ‘그냥’ 물에 들어가 씻기만 하면 죄가 용서된다고 합니다.”>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으니 저도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요한이 그런 말을 했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성경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매일미사 책 - “사람들은 ‘설마’ 하며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죄의 용서’의 느낌을 안고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의 은총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글쓴이의 완전한 창작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고,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없습니다.
요르단 강의 물은 당시 유대인들의 죄를 자동적으로 용서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주님이 기적의 은총을 베푸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고해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의 전 단계에서 성찰, 통회, 정개를 할 것이 요구됩니다.
특히 통회가 중요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사로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그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께서 꿰뚫어보실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먼저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회개했고,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오복음 3,1-2)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마태오복음 3,7-8)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오복음 3,5-6)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요르단 강물이 자동적으로 죄를 용서해준 것이 아닙니다.
요르단 강에서 그런 기적은 없었습니다.
매일미사 책은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이고,
이 책을 많은 본당에서 사용하고 있고,
이 책이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매일미사 책은 일종의 교과서입니다.
교과서는 교과서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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