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대림제4주간화요일(091222.화)

도구 Ludovicus 2009. 12. 22. 11:59

<대림 제4주간 화요일>(2009. 12. 22. 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12월 22일의 복음 말씀은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일들을 노래로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에 들어 있는 희망은 사실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구원자”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는 하느님”

“나에게 큰일을 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는“

그런 하느님.

 

어떤 이들은 이 노래를 공산주의나 좌익 진보 사상으로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런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희망을 노래한 것입니다.

 

왕자로 태어나서 왕으로 살다 죽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습니까?

재벌 2세로 태어나서 재벌로 살다 죽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하느님은 그런 극소수 특권층의 하느님이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면 소위 특권층, 상류층은 하느님을 믿을 자격도 없단 말인가?

라고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극소수 특권층,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깔보고 낮춰 보는 태도로 인생을 사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을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성인 성녀 중에는 왕도 있고, 왕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나 특권을 버린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받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밥을 이미 많이 먹어서 밥 생각이 없다고,

그러면서 밥 먹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밥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기적의 음식, 만나, 성체가 쏟아진다고 해도

배가 고파서 먹는 사람에게만 생명의 양식이 될 뿐입니다.

배가 불러서 먹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예가 코린토 1서에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을 꾸짖는 구절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1코린 4,8)

 

잘난 것도 없는데 잘난 체 하고,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부족함도 아쉬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청원의 기도를 바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감사 기도를 바칠 줄도 모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받을 것이 없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은 준다고 해도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총은

그들의 비천함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유함이 진정한 부유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 세상에서 왕이라는 신분이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

교만은 곧 비참함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깨닫는 것,

그걸 깨닫게 하는 것이 곧 은총입니다.

 

가난함 자체가 은총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함 때문에 하느님을 더 찾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면 가난함은 곧 은총이 됩니다.

 

굶주림 자체가 은총은 아니지만

굶주리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면

굶주림은 곧 은총으로 작용합니다.

 

세상이 다 자기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사탄의 마음입니다.

사탄이 처음에 예수님께 접근해서 유혹했을 때,

두 번째 유혹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루카 4,6-7)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착각한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히틀러.

모두 다 사탄의 하수인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등은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탄의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남의 인생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다가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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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첫째 조건입니다.

 

마리아의 위대함은 바로 그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이들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유층, 상류층, 특권층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비는

복수와 저주의 노래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노래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겸손한 이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식의 인생역전을 이루시는 것에 대한 찬양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혁명적인 종교였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회의 신분제도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외형적으로는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주인과 노예는 동등한 형제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주인과 노예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이미 노예제도는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지배국과 식민지가, 주인과 노예가, 남자와 여자가,

부자와 빈자가, 고학력자와 저학력자가, 상류층과 하류층이...

모두 다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그리스도교가 해낸 것입니다.

 

(지금의 교계제도,

즉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차이를 신분 차이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직분의 차이입니다.

각자 맡은 일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보다 성직자가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

신자는 성직자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 착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이고,

몸의 지체에는 높고 낮은 차이란 없습니다.

손은 손이고 발은 발입니다.

발이 손보다 낮은 것 아니고, 손이 발보다 높은 것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여간에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의 이상향,

즉 하느님 나라를 노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늘 꿈꾸는 그곳,

우리가 늘 희망하는 삶.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실 때 이미 그 나라는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셨고,

사도들은 그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고,

우리도 지금 그 나라의 건설을 위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곧 우리들의 노래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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