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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림제3주간토요일(091219.토)

도구 Ludovicus 2009. 12. 19. 10:07

<대림 제3주간 토요일>(2009. 12. 19. 토)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립니다.

즈카르야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됩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을 ‘벌’이라고 하거나,

‘보속’이라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불공평하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즈카르야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부부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꾸짖기만 하셨을 뿐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처음 만났을 때 백성을 구하라는 사명을 받았었는데,

그때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 말을 안 믿을 것이라고 했고,

자기는 말솜씨가 없어서 그 일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모세 자신이 믿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그를 설득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라고 하자

기드온은 천사에게 믿을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그의 요구대로 여러 가지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믿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냥 바로 벌을 받았다???

구약성경의 다른 이야기와 비교해볼 때 불공평한 일입니다.

 

사실 못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즈카르야는 안 믿은 것이 아니라 못 믿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믿었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믿지 못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상식이라는 것의 한계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그런 이유로 믿지 못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상식을 초월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믿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꾸짖으셨지만 죄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모세를 꾸짖고 달래기는 하셨지만 죄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기드온에게는 의심이 많다고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기는 하셨지만

그것을 죄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접 눈으로 본 일들도 믿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즈카르야는 눈으로 본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상식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었던 그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벌’이나 ‘보속’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가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소 밖에서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들도

그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나보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무도 그가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즈카르야가 천사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전적으로 즈카르야 자신의 체험입니다.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 일을 복음서에 기록할 때 즈카르야 자신의 증언을 적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2서 12장에서 자신의 환시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천국에 가서 어떤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떤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말해선 안 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들은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즈카르야의 일은 바오로 사도의 경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는 발설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는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말을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명색이 사제직에 있는 사람이 믿지 못했으니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란 자기 믿음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먼저 믿어야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사제는 사제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제는 사람들에게 말할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제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입을 닫아버려야지요.

즈카르야는 자기가 믿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거나, 크게 자책했거나,

아니면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계속 믿음 없는 상태로 있었거나...

그랬을 것입니다.

 

그의 의심이 풀릴 때까지, 그는 사제로서 말할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입을 닫아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말할 자격도 잃었고...

 

하여간에 사람들에게는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 자체가

하나의 표징으로 작용했습니다.

요한이 태어났을 때 즈카르야가 비로소 말을 하게 된 것이

아주 극적인 장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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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걸핏하면 보속이다, 십자가다, 벌이다, 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내가 죄가 많아서 보속을 주시나보다,

또는 내가 죄가 많아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는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다,

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아니, 그렇다면, 진짜로 죄가 많은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잘 산답니까?

천벌을 받아도 남들보다 몇 백배는 더 받아야 할 인간들은 잘만 살고,

착한 사람들은 그냥 쉽게 벌이나 보속을 주신다면

그렇다면 하느님은 참으로 불공평한 분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거나 다 십자가라고 한다면,

십자가 다음에 당연히 찾아올 부활은 왜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것입니까?

개나 소나 다 십자가를 진다면 그건 그다지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은

그냥 고통과 시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인간들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 더 많고,

악의 힘에서 오는 것도 많습니다.

 

아, 그 사람 자신이 자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연대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런 고통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서 제거해야 합니다.

하느님 탓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연재해, 질병, 사건, 사고들은 인간들이 힘을 합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극복해야 할 ‘악’입니다.

보속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사람마다 따로 판단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벌’이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여간에 오늘 강론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믿지 못한다면 말을 하지 마라.”

 

사제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고,

사실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 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하는 것은 신앙인이라고 자기를 내세울 자격을 잃는 것이고,

믿을 수 있는 일도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가 됩니다.

 

다시 요약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믿는다면 증언하라.

믿지 못한다면 아예 입을 닫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따지지 말고,

믿고, 믿음을 증언하든지, 아니면 침묵을 지키든지...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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