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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림제1주간화요일(091201.화)

도구 Ludovicus 2009. 12. 1. 08:03

<대림 제1주간 화요일>(2009. 12. 1. 화)

 

<믿음, 참된 지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루카 10,21)

 

예수님의 기도는 이런 뜻으로 들립니다.

 

“스스로 지혜와 지식이 많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알지도 못하지만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누군가 저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아느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모르면서 왜 믿느냐? 라고 묻는다면

모르니까 믿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믿음이란 아는 것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정말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느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믿는다고 분명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증명해보라고 요구하면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믿고 있습니다.

 

이것도 말장난 같지만 저에게는 진실입니다.

저의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셨음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그 사랑을 믿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항상 제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걸 과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시도 자체가 말장난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믿습니다.

이건 교리를 배워서 믿는 것도 아니고

성경이라는 책을 읽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제 삶이고, 제 마음이고, 저의 깨달음입니다.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하느님이란 없다고 믿는다,

라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저는 이렇게 요구하고 싶습니다.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아라.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걸 왜 증명해야 하냐? 네 눈앞에 내가 이렇게 있지 않으냐?

그 말은 사실은 증명할 수 없다는 대답입니다.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왜 증명해야 합니까?

이렇게 우리 눈앞에, 우리 마음속에 항상 사랑으로 계시는데.

 

네 눈앞에 이렇게 내가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니 나는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에게

내 눈이 안 보여서 너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너는 없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그럼 만져보라고 하겠지요.

촉각 신경이 마비되어서 만져도 모른다고 하면?

말소리를 들으라고 하겠지요.

그 말소리가 그 사람의 말소리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런 식의 논쟁이 한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믿음은 학문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삶’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믿음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평생 신학과 성서학을 연구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도

믿음이 없어서 그냥 무신론자로 남아 있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과학만 연구하고 권위 있는 과학자로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도

아주 깊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공부를 해야만 하느님을 잘 알게 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종교와 신앙은 머리 좋고 똑똑한 학자들이 독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신학자도 있어야 하고 성서학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에 학자들만 모여 있으면 말만 많고 시끄러운 집단이 될 것입니다.

 

이런 주제로 글을 쓰게 되면 꼭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비안네’ 성인입니다.

 

공부를 너무 못해서 신학교 졸업도 못할 뻔 했고,

특별한 재주나 재능도 없었고,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미사 드리고 고해성사 주는 것뿐이었던,

평생 ‘아르스’라는 시골 본당의 주임신부로만 살았던 분.

 

그분이 남긴 업적이라고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많이 주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분이 했던 강론도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강론이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그분은 가톨릭 이천 년 역사에서 본당신부로는 유일하게 성인이 된 분입니다.

 

성인 성녀들 중에도 위대한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 성녀들 중에는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한국의 103위성인 중에 성직자가 열 명이고 나머지는 일반 신자들인데,

그중 몇 분은 학자 출신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서당도 제대로 다닐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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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블로그에 강론을 쓰고 성경해설을 쓰고 있지만

이건 그냥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의 글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윤활유 역할이라고나 할까.

그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에 대해서, 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난 체 할 수 없습니다.

뭔가 아는 체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가르침을 직접 들었던 열두 사도들도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사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먼저 믿었기 때문에 차츰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된 것은 성령강림 후의 일입니다.

그들은 먼저 믿었고, 믿음을 통해서 깨달았고, 알았고,

그 다음에야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학식을 쌓아도,

논문조작이나 하는 그런 학식이라면,

독재 권력에 아부나 하고 권력의 하수인이나 되는 그런 학식이라면,

그런 지식과 학식은 사람을 살리는 약(藥)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독(毒)입니다.

 

믿음으로 생명을 얻으려면 그런 독(毒)은 버려야 합니다.

지금 뭔가 알고 있다는 자만심과 자부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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