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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3주간화요일(091117.화)

도구 Ludovicus 2009. 11. 17. 06:4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2009. 11. 17. 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자캐오>

 

11월 17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19장 1절-10절,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귀한 손님으로 접대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초대한 것이고

자캐오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종교와 신앙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고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나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에 응답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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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투덜거립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죄인의 집’ - 고해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니...

 

사제가 고해실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 안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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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의 키가 작았다는 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거나

아니면 어떤 상징적인 뜻이 숨어 있을까?

 

성경을 해석할 때 그런 내용이 나오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한다.’ 라고.

 

그러나 자캐오의 키가 작았다는 것에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그것은 상황 묘사일 뿐입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것은

그 정도로 그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책에는 키가 작은 것이 ‘핸디캡’이었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그건 그의 핸디캡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설명입니다.

키가 크고 작고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캐오의 진짜 핸디캡은 ‘세리’라는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 제국 정부를 위해 일한다는 것.

(우리식으로 말하면 공개적인 친일파라는 것이지요.)

 

그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부정부패와 비리와 직결된 것이었으니

사람들은 세리들을 공공연한 도둑으로 취급했습니다.

말하자면 로마 정부의 허가를 받은 관제 도둑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

당시 세리가 부자였다는 것은 부정한 재산을 많이 모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이 그의 핸디캡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인들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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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자신의 모든 핸디캡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재산을 포기합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을 네 곱절로 갚고 나면

그의 재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그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은총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총에 응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총을 받기만 하고 응답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뽑힌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베냐민 지파,

지파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집,

 

사울의 외적인 조건만 보면 그는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왕으로 정하셨습니다.

 

사울은 겸손하게 처신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을 질투했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다가 국력만 낭비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저런 죄까지 짓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왕을 잘못 뽑으신 것이 아니라

왕으로 뽑힌 사울이 은총에 응답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만의 어떤 기준으로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그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여간에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사랑을 배신했습니다.

베드로는 잠깐 흔들려서 그 사랑에 응답을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잘못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사랑과 은총에 응답하는 자세가 제각각 달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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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잘난 체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어떻게, 얼마나 응답할 것인가? 모든 신앙인의 숙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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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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