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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3주일(091115)

도구 Ludovicus 2009. 11. 15. 10:10

<연중 제33주일>(2009. 11. 15)

 

<종말>

 

성경은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로 시작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한 묘사로 마칩니다.

 

성경에는 윤회사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과 우주의 역사는 단 한 번이라고 믿습니다.

 

천지 창조 이전의 우주는 ‘어둠이 심연을 덮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종말 후의 세상은

빛과 질서와 조화, 행복과 기쁨과 생명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종말은 창조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파괴나 멸망이 아닙니다.

 

종말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만일에 종말이 새로운 시작이라면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끝을 향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끝이 없기 때문에

종말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없습니다.

 

종말이란 인류가 모두 멸망하는 마지막이 아니고

태초에 시작되었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은 두려운 날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종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도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의 삶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혀 시험공부를 하지 않은 학생이

시험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시험공부를 하면 될 것입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기만 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무섭다면 지금이라도 대비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만 한다면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몸이 더럽다면 씻으면 됩니다.

자신의 과거가 부끄럽다면 회개하면 됩니다.

 

또 종말을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혼자 죽는 것도 무서운 일인데 인류 전체가 한꺼번에 죽는다고 하니까

종말이 더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사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죽음 자체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나

죽은 사람의 모습이 대부분 끔찍하다는 것도

우리를 무섭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무섭다면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연히 믿음입니다.

 

낯선 곳에 혼자 버려질 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누군가 보호자가 옆에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보호자에 대한 믿음이 곧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이승에서의 삶을 위한 일보다는

저승에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종말을 두려워합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믿느냐? 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믿느냐? 도 중요합니다.

 

의학과 과학이 인간의 수명을 조금 더 늘릴 수는 있겠지만

죽음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죽음도, 종말도 막지 못합니다.

 

과학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도 미신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속세의 허무한 것들을 믿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되면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잃고 흔들릴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것들이 모두 힘을 잃을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 말씀으로도 해석됩니다.

 

그건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다이아몬드를 준다고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는 동안 권력과 사람들의 존경과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심판대에 설 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변호인이 아니라 고발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 나를 변호해줄 것인가?

아니면 나를 고발할 것인가?

 

나에게 불리한 물증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면

지금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그때 이미 종말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의 접근이 차단되었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묵시록 22장에서 완전히 개방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역사는

쫓겨난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역사입니다.

 

종말은 닫혀 있던 에덴동산의 문이 열리는 때입니다.

열린 그 문으로 누가 들어갈 것인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입장 자격이 결정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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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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