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중제32주간토요일(091114.토)
<연중 제32주간 토요일>(2009. 11. 14. 토)
<기도의 육하원칙>
1) 언제 - ‘지금’입니다.
나중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2) 어디서 - ‘여기서’입니다.
자기가 있는 그곳이 기도 장소입니다.
특별한 기도 장소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3) 누가 - ‘나’입니다.
4) 무엇을 -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사람들은 흔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일만,
그것만을 기도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첫 번째로 청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집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5) 어떻게 - 끈질기게.
6) 왜 -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나의 일치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과 내가 완전하게 일치한다면
그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될 것입니다.
묵시록 맨 마지막 부분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얻게 되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것은 곧 모든 것을 다 얻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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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뭔가 절박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도에 대해서 위와 같은 정의만 내리고 강론을 멈춘다면
힘이 빠지고 허탈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절실한 심정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11월 14일의 복음 말씀은
그렇게 절실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줄곧... 졸랐다.’
‘끝까지 찾아와서‘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이 구절들은 11월 14일 복음 말씀에서
끈질긴 기도를 강조하는 구절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라는 두 구절입니다.
이 두 구절은 하느님께서 신속하게 응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응답이 늦어지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뒤에서는 응답이 신속하게 올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앞뒤의 말씀이 모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응답을 주신다면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은
응답이 늦어지더라도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응답을 알아듣고, 알아볼 수 있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응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마태 6, 8).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 7-8).“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끈질긴 기도입니다.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 기도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실망할 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실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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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바라는 만큼의 성적이 안 나왔다고 우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년 봄에 대학 입시가 모두 끝나고 나면
바라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좌절하는 학생들과 부모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부모와 학생이 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는 신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해마다 되풀이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속에 세속적인 욕심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그 욕심을 기도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그 욕심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기도,
그걸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
출세하고, 승진하고, 돈 벌고...... 바로 그런 욕심 아닙니까?
(물론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 욕심 어느 곳에 하느님께서 설 자리가 있습니까?
그저 자기 욕심일 뿐이지요.
이렇게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 이유로 하느님을 믿은 것인데,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면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좀 더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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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겨우 그런 기도나 들어주시려고
십자가에 매달려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것일까요?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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