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중제31주간토요일(091107.토)
<연중 제31주간 토요일>(2009. 11. 7. 토)
“루카복음 16,9-15”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불의한 재물’이란 ‘세속의 재물’을 뜻합니다.
‘친구들을 만들어라.’ 라는 말씀은 자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라는 말씀은
세속의 재물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선과 선행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이 말씀은, 재물은 언젠가는 없어지겠지만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작은 일’이란 먹고사는 일, 세속 재물을 사용하는 일을 뜻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하다는 것은 세속의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큰일’은 영적인 일, 영혼 구원에 관한 일입니다.
큰일에도 성실하다는 것은 영혼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여기서도 ‘불의한 재물’, ‘남의 것’은 우리가 가진 세속의 재물을 뜻합니다.
왜 그게 남의 것인가?
재물이란 원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
처음부터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것’과 ‘너희의 몫’은 영혼 구원,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 남의 것을 성실하게 다룬다는 것은
세속의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자선과 선행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참된 것, 우리의 몫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 말씀은 ‘돈’을 의인화해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는 악마적인 존재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잘 다스리면 돈은 우리의 충실한 종이 되겠지만,
돈에 집착하고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가 돈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세속의 재물로 향해 있다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부자로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자로 살기 위해서 하느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을 위해서 하느님을 종으로 부리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유대인들은 부자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섬기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빌기 위해 종교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만 많이 하면 속세의 일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헌금만 많이 하면 하늘에서 돈벼락이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돈을 가져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구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에게 말씀하시길,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빈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신자들에게 자기네 교회에 돈을 많이 바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종교는
전부 다 사이비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으로 바치는 제사는 역겹다고 하셨습니다.
속세의 복을 받을 욕심으로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흥정도 거래도 아닙니다.
마치 하느님과 거래를 하듯이
헌금을 바치고 기도를 하면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을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친다고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냥, 선물로, 무상으로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다 감사예물입니다.
복을 받으려고 조건부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감사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수능시험 전날 합격 기원을 하면서 미사예물을 바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에 합격한 다음에는
합격을 감사하는 예물을 바치는 신자는 적습니다.
전에 있던 본당에서 여름에는 큰 물난리를 겪고,
겨울에는 폭설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구에서 본당으로 재해 복구 지원금이 왔습니다.
그런 돈은 항상 말썽의 원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그 돈에 대해 어떤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돈이 자기에게 제대로 오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해 복구를 위해 본당에서 여러 가지 자재를 구입해서 나눠주자
필요 이상으로 신청을 해서 받아갔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는 지원금을 사양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자는 지원금도 받지 않고, 오히려 감사예물을 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감사했을까요?
피해가 그 정도로 그친 것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추하게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추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욕심 없이 사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정말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사자, 하이에나, 치타가 아프리카의 3대 포식자라고 합니다.
그런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서 사냥을 합니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도 사냥을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더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것도 인간이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도 인간이고,
자기 자신의 생명까지 파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지구상에서 동족끼리 전쟁을 하고 살육을 하는 유일한 무리가 인간입니다.
배가 고파서 남의 것을 뺏는 것이 아니라
더 갖고 싶어서 뺏는 것이 인간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대가로 돈을 받았습니다.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돈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목숨과 반대쪽에 있었다는 것,
우리에게 심각한 묵상 주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반대쪽에 유다의 배신과 돈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착한 사람 손에서는 선행의 도구가 됩니다.
부자는 자기 재산으로 더 많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돈을 선행의 도구로 쓸 줄 모른다면... 차라리 그 돈을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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