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중제31주간금요일(091106.금)
<연중 제31주간 금요일>(2009. 11. 6. 금)
<약은 집사의 비유>
성적 미달로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한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다음 해에 다시 신학교에 도전해서 또 입학했습니다.
두 번째로 입학했을 때 친구들은 2학년이었습니다.
그 친구들 도움으로 1학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생은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퇴학당했습니다.
또 성적이 미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하여간에 성소가 없었나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학교는 일반 대학과는 달리 입학은 쉬워도 졸업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입학도 어렵습니다.)
졸업이 어려운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학업 성적입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성적에 미달되면 가차 없이 제적됩니다.
저는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갔기 때문에
이미 이수한 교양과목의 학점을 인정받은 상태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학생들보다 훨씬 더 시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신학교 공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시험 기간에 유일하게 소등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은 화장실이었는데,
모두 다 화장실에 모여서 밤새워 시험공부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전에 일반대학에 다닐 때의 강의실 풍경이 생각납니다.
강의실 벽과 책상에 깨알 같이 빽빽하게 적혀 있던 글들...
시험 때 컨닝을 하기 위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적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컨닝 페이퍼라고나 할까.
학생들이 다 그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다들 그저 그러려니 했습니다. 필요하면 누구나 조금씩은 그렇게 했고.
그러나 신학교에서는 컨닝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예 시험 감독을 하지 않습니다.
컨닝을 하다 적발되면 무조건 퇴학이지만
신학생들 분위기 자체가 컨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꾸준히 죽어라고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컨닝을 한다든지 잔머리를 굴려서는 신학교를 졸업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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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의 복음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집사가 해고를 당하자 주인의 재산을 이용해서 살 길을 찾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서 그 빚을 마음대로 깎아줍니다.
나중에 그 사람들 덕을 보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의한 집사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
그 집사의 무엇을 본받으라는 것인지,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렇게라도 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낫다는 것인지...
그러나 예수님께서 결코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 복음 말씀을 해석할 때 가장 난감한 구절이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라는 구절입니다.
200주년 성서는 ‘주인’을 ‘주님’으로 번역해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그 집사의 불의한 행동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민첩하게 살 길을 찾는 모습을 칭찬하셨다고 해석합니다.
그게 말이 되나? 그 민첩성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나?
저는 ‘주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원문의 단어는 ‘주님’으로도, ‘주인’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칭찬’이라는 단어입니다.
어떤 주인이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자를 칭찬할 수 있을까?
여기서 ‘칭찬’은 정말 잘 했다고 칭찬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래, 너 잔머리 잘 굴리는구나... 생각보다 영리한 걸?”
그런 정도의 감탄? 아니면 기가 막혀서, 또는 어이없어 하는 태도?
마지막으로 그 불의한 집사를 누구로 해석할 것인가?
우리와 상관없는 어떤 사람으로 해석한다면 이야기가 복잡하지만,
그 불의한 집사를 바로 우리 자신으로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간단해집니다.
불의한 집사를 우리 자신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됩니다.
“너희들은 먹고사는 일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일에도 그렇게 정성을 좀 쏟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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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생활력은 세상이 알아줍니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서, 하와이에서, 북만주에서... 지구 어느 곳에서든지...
기어이 살아남은 것이 한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보다 저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족이 있으니,
바로 유대 민족입니다.
나라를 잃고 이천 년 동안 떠돌아다녔어도,
온갖 핍박과 서러움, 온갖 고난과 박해를 다 겪었으면서도,
히틀러에게 육백만 명이나 학살당했으면서도,
기어이 가나안 땅에 자기들 나라를 세운 민족.
유대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두드러졌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잡혀가고, 귀양살이하고,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복음 말씀에 나오는 불의한 집사는 그대로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집념.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유대인들이 미움 받은 원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은 모습의 이면에는
그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자신의 그런 모습을 예로 들면서
현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을 하는 것만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려는 노력도 좀 하라고 타이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전쟁을 겪고, 군사 독재도 겪고,
정말 고난의 역사를 헤쳐 오면서 우리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모습은 여전합니다.
옛날에는 정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끈질기게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좀 더 잘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노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좀 더 잘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들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몰고, 좋은 음식 먹는 것?
아니, 남들보다는 아니더라도 남들 수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봄에 꽃구경을 가고, 여름에 바캉스라는 것을 가고.
가을에 단풍 구경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
(물론 전부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가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관광을 가야 하니까 가는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술도 먹어줘야 하고, 술을 먹었으면 춤도 추어야 하고,
노래도 불러줘야 하고. 사진도 많이 찍어야 하고...
마치 뭔가에 쫓기는 모습이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모습들입니다.
국내 여행도 그렇지만 외국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경력을 쌓는 것처럼
어떤 강박관념 속에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이나 차를 사는 기준도, 옷이나 가구를 사는 기준도,
학교나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도... 소위 ‘명품’이라는 것에 환장한 사람들.
남의 시선과 남의 수준을 의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노력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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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을 때(요한 12,1-8),
유다는 그 향유 값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불평을 합니다.
유다의 말에 대해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평을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유다가 돈주머니의 돈을 가로챘다는 것,
불의한 집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요한복음서 저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유다 너 잘났다. 이 도둑놈아. 돈 계산은 잘도 하는구나.”
속세의 돈 계산에 밝은 유다의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계산에는 빠른데... 영적인 계산은 하지 못하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필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가진 것을 다 판다는 것은 인생 전부를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잔재주나 잔머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삭빠른 계산이 아니라, 전부를 다,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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