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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1주간목요일(091105.목)

도구 Ludovicus 2009. 11. 4. 23:23

<연중 제31주간 목요일>(2009. 11. 5. 목)

 

<잃은 양 한 마리>

 

전쟁에서 전투를 하다보면

적의 후방에 혼자 낙오되는 병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태평양 전선에서의 일입니다.

그렇게 낙오된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서 파견된 미군 특공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사 하나를 구출하려다가 여러 명의 특공대원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일본 군인들은 그런 미군의 모습을 보면서 어리석다고 비웃었답니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죽다니... 저런 바보들...”

그런 경우에 일본 군대는 그 낙오된 병사를 포기했던 것이겠지요.

여럿을 잃는 것보다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전쟁에서 일본이 지고 미국이 이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할 때

그 한 사람의 충성심과 전우애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럿을 잃는 것보다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런 군대에 속해 있는 병사라면

혼자 낙오되는 순간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할 것입니다.

그런 군대는 속에서부터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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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정치가는 사랑으로 다스립니다.

독재자는 공포로 다스립니다.

 

사랑으로 다스리면 말도 안 듣고 질서도 없고 통치도 안 될 것 같지만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을 얻게 되는 법입니다.

 

공포로 다스리면 말도 잘 듣고 질서가 잡히고 통치가 잘 될 것 같지만

그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세종대왕 같은 성군에게는 아무도 반란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도 임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독재자나 폭군의 마지막이 항상 비참하게 끝나는 것은

미움과 공포의 응답은 미움과 공포뿐이기 때문입니다.

무서워서 숨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복종이 아닙니다.

 

경찰력의 힘으로 정치를 하는 대통령은

평생 경찰의 경호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뿌린 미움의 씨앗은 결국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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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비유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너를 구하다가 내가 죽더라도 상관없다.”

예수님은 그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사랑은 경제 원리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커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잃을 각오를 하고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사랑.

 

사랑은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고 미치는 것이고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사랑은 논리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고 상식도 아닙니다.

불붙은 집에 갇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죽고 마는 엄마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사랑’, 그 한 마디뿐입니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어서 죽고 마는 아빠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사랑’ 그 한 마디뿐입니다.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붙는 집에 갇힌, 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드는 부모의 모습 그대로 그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그럴듯하게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랑’, 그 한 마디만 하면 십자가의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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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후방에 낙오된 전우를 구하러 가는 특공대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나는 나를 구하러 오는 동료를 믿고 기다릴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전우를 구하러 갈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는 바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간다.”

라는 심정으로 동료를 구하러 가는 특공대원들...

그 동료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병사의 심정.

전우애도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차갑고 냉정하게 됩니다.

남의 아픔에 무감각해지고 남의 슬픔에도 관심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배반을 하고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아셨을 때에도

그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회개시키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베드로가 겁에 질려 흔들렸을 때에도 그가 사랑으로 용기를 갖도록 기다려주셨습니다.

 

보통의 인간 사회라면... 유다의 배반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그걸 실행에 옮기기 전에 먼저 처단해버렸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서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상식과는 반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도 사랑하셨고 베드로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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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양이라고 해서 다 같은 양은 아닙니다.

유다는 분명히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 발로 떠나버린 양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가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달아나버린 다른 제자들도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되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차갑고 무섭고 냉정한 분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죄를 지을 때가 있고,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유다가 될 수도 있고, 나약한 베드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유다처럼 포기하고 자살할 것인가,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되돌아와서 사랑을 회복할 것인가,

그건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결단할 일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양이라고 생각한다면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한 마리 양이다. 그러니 나를 찾으러 와라.”

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오만 방자한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그건 그냥 유다의 태도일 뿐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의 아버지는 아들을 찾으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잃어버린 양의 목자와 다른 모습입니다.

 

양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기 때문에 목자가 찾으러 가야 하는 것이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자기 발로 집으로 돌아오면 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가지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아버지가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회개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고해실 문은... 그냥 열고 들어가면 됩니다.

고해틀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면 됩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양식 같은 것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고백을 하고 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고해실의 순교자’라고 불리는 아르스의 비안네 성인도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유럽을 돌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일생 동안 그냥 ‘아르스’ 라는 시골에만 있었습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싶어 하는 신자들이 유럽 전역에서 아르스로 몰려갔습니다.

 

언제까지 본당신부가 집에 찾아와주기를 기다릴 것입니까?

성당에 가는 길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냉담자 여러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권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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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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