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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시몬과성유다사도축일(091028.수)

도구 Ludovicus 2009. 10. 28. 07:17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2009. 10. 28. 수)

 

<사도 - 예수와 한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형 당하게 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다고 나선 꼴베 성인에게,

수용소장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물었을 때,

성인의 대답은 "나는 천주교 신부다." 였습니다.

 

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나는 신부다.' 라고 했을까?

그것이 늘 저에게는 묵상의 주제가 됩니다.

 

꼴베 성인은 '꼴베'라는 사람이 아니라 '신부'로 죽었습니다.

'신부'란 직업도 아니고, 직책도 아닙니다.

신부란, 신부로 사는 사람이고, 신부로 죽는 사람입니다.

 

신부란 신부로 사는 삶 자체입니다.

출신이나 이름이나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부로 산다는 것은 출신도, 고향도, 이름도 다 버리고

예수님 뒤만 따르다가 신부로 죽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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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신부님들은 은퇴하면 결혼해도 되나요?"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은퇴해도 신부인가? 라는 질문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신부들의 은퇴는 직장을 정년퇴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란 하나의 삶이기 때문에, 현직에서 물러나도 죽을 때까지 신부입니다.

 

옛날에 시국 사건으로 신부님들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을 때,

판결 중에는 '징역 몇년, 집행유예 몇년, 자격정지 몇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판사들이 무슨 권리로 신부의 자격을 정지시키느냐?' 라고 흥분했습니다.

그 판결의 '자격정지'는 신부 자격을 정지시킨 것이 아니고,

시민권을 정지시킨 것인데, 그걸 잘 몰랐던 것입니다.

 

신부 자격을, 즉 신품성사의 효력을 누가 정지시킬 수 있습니까?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성무집행 권한이 정지되기는 해도

한 번 신부는 영원한 신부입니다.

 

신자들의 자격(세례성사의 효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다음에도 신자입니다.

냉담 중이라고 해도.

(세례대장은 세상 종말 때까지 보관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정년퇴직도 없고, 휴가도 없고, 방학도 없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한 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신자라는 말은 직업도 직책도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삶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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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축일 강론을 준비할 때마다 '사도'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사도'란 직업도 아니고, 직책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뒤따르고, 예수님을 증언한 삶 자체입니다.

 

그들이 사도가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되어서 사도로 살다가 사도로 죽었다는 것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가리켜서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예수와 한패'라고 표현합니다(마르코 14,66-72).

 

만일에 그 자리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했다면,

그들 말처럼 자신이 예수와 한패인 것이 맞다고 했다면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예수와 한패' 라는 말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운명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같이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자신과 예수님은 운명공동체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같이 죽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날의 일은 베드로가 사도로 살다가 사도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다 죽을 것인지...

중요한 갈림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달아났던 다른 사도들도 모두

그날 그런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출발점이었습니다.

유다를 제외하고 다른 사도들이 종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갈림길에 설 때마다 계속 예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긴 했지만,

체포되는 것이 무서워서 달아나긴 했지만,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되돌아갔습니다.

갈림길에서 잠깐 흔들렸을 뿐입니다.)

 

선택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 선택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서 있는 자전거는 넘어집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하고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계속 앞으로 나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멈추고 망설이면 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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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리켜서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사도행전 4,13).

 

세상 사람들 눈에는

사도들은 보잘것없고,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 자신들을 '사도'로 소개하는 말을 맨앞에 썼습니다.

'나는 사도다.' 라는 의식이 뚜렷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고향이 어디인지, 원래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가족이 누구인지,

그런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고,

예수님의 사도라는 사실만 중요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후의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표현이 좀 거칠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예수님과 한패'라는 것을 온 세상에 공개합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예수님과 자신들은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예수님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게 어디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모든 순교자들이 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사도나 순교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다 함께 죽는 운명공동체,

예수와 한패,

모든 신앙인이 은총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물을 때

맨처음 대답으로 "OO성당 신자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누구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신부들은 대부분 '나는 OO성당의 본당신부다.' 라고 대답합니다.

아니면' 천주교 신부다.' 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먼저 대답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상대방이 이름을 묻는다면 그때 가서야 이름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신부라는 사실을 과시하는 교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신부로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업도 아니고, 직책도 아니고,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꼴베 성인과 같은 뜻의 대답인지,

아니면 그냥 직책을 말한 것인지,

그건 각자 알아서 반성할 일입니다.

 

이것이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될 일은 아닙니다.

일반 신자들도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이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넌 누구냐?"

"나는 천주교 신자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질문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진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에티켓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늘 '나는 신자다.' 라고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내 삶은 신자로서의 삶이다,

나는 신자로 살다가 신자로 죽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 한 마디를 하든, 행동 하나를 하든 신자로서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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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 열두 사도들만의 사명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말로써, 삶으로써 그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열두 사도들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된 뒤에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도들을 공경하고 본받는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름, 출신, 학력, 직업...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에서 그런 게 중요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가?

예수님을 위해서 살다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것인가?

 

사도들의 축일을 맞아 입으로만 공경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와 한패인가?"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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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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