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앙 자료
[스크랩] 지거쾨더 신부님의 성화 사진전
도구 Ludovicus
2009. 10. 23.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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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처 사형 선고 받으심 넘겨주다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예수께서는 신성모독자이자 정치적 반란자로 붙잡혀 |
묶이고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
분은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라는 맷돌 사이에서 가루가 될 밀알이셨다. |
그 그분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사명에 충실했다. 즉 '눈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 |
고, '앉은뱅이들'을 다시 자기 발로 일어서도록 도와주고,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
소외상태에서 해방시켰는데, 이는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을 염려하는 사랑의 하느님 |
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림에서 예수께서는 가야파와 빌라도 앞에 서 있다. |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권력구조의 대표자들이 |
다. 가야파는 토라 두루말이를 꽉 붙잡고 있는데, 그것이 그에게 성스러운 하느님의 율 |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만에 찬 찡그린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셨기 |
때문이다. 오른쪽에 빌라도가 있다. 이는 심각한 종교적 갈등에 빠져들어간 세속적 권 |
력을 대변한다. 빌라도는 이 갈등을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 |
는 붉은색 옷을 걸치고, 빌라도는 '무죄'의 물에 자신의 손을 씻는다. 대야의 물이 핏빛 |
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다. 이것은 그가 이 살해모의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살해공모에는 종교 지도자와 세속적 권력자의 손은 함께 협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판관들 앞에 상체 |
를 드러낸 채 고개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걸친 옷의 붉은 색은 왕이심을 드러내는 |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
빼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긴다'(이사 50,5-6)는 말씀처럼 내 맡 |
겨진 자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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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처 십자가 지심 끌어안음 |
'그 분은 몸소 십자가를 지셨다' |
판결이 내려졌고 처형은 행해진다. 채찍질 때문에 피를 흘리는 그의 손이 십자가를 잡 |
고 있다. 그 손은 들보를 껴안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예수께서는 이 |
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지거 쾨더는 십자가의 길에서 시간 |
을 넘어서서 다른 강조점을 부여한다. 가로 들보 위에 무거운 철 갈고리가 걸려있다. |
그리고 가로 들보와 평행하게 처형장으로 이어지는 레일이 있다. 이는 베를린의 플뢰 |
첸제(Pl tzensee)에 있는 감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광경이다. 그곳에서 1944년 |
7월 나치의 앞잡이들은 불의와 증오의 독재에 대항해서 투쟁했던 남자들을 처형했다. |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고, 그들의 말살이 곧 이어졌다. 플뢰첸제의 철길은 고문당하고 |
처형당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들은 정의, 인간존엄, 억압당한 사람들의 자 |
유를 위해 투신했던 것이다. 권력과 무기력, 편협함과 자유, 억압과 절규 사이의 투쟁 |
이 피의 띠처럼 역사를 관통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곳 어디서나 나자렛의 |
예수를,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된 분을 기억할 수 있다. | |

제3처 첫 번째 넘어지심
제4처 성모님을 만나심
아무 말이 없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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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처 시몬이 함께 십자가를 짐 유일한 아들 |
'그들은 그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
얼굴 둘, 몸 둘, 손 넷, 무거운 들보 하나가 있다. 그들은 이 들보를, 짓누르는 십자가 |
들보를 어깨에 짊어졌다. 마치 그들이 짐을 짊어지는 일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그들 |
이 어떻게 자세를 고수하는지 눈길로 더듬고 싶어진다. 팔 하나는 공동의 짐을 감싸고 |
, 다른 팔 하나는 상대방을 감싸고 있다. 복음서는 키레네 출신의 남자를 시몬이라 말 |
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농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처형장 |
으로 가고 있는 행렬과 만난다. 왜 그가 병사들에게 호출 당했을까? 시몬은 들보를 꽉 |
움켜잡고 나르기 시작한다. 지거 쾨더는 이 그림에서 복음서의 진술로부터 벗어나 자 |
기 자신의 길을 간다. 시몬은 예수 앞에서 십자가를 운반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 |
가를 짊어진다. 이로써 시몬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일깨워준다. 두 얼굴은 얼마나 |
닮았는가! 얼굴 생김새, 눈, 코, 입, 수염 등 이 두 사람이 혼동될 정도로 비슷하다. 다 |
만 푸른 옷을 입은 사내는 얼굴에 자기 일의 색채를 띠고 있다. 붉은 옷의 사내는 창백 |
한 얼굴에 모욕당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뒷면에 있는 그들의 팔은 서로 교차되어 상 |
대방의 몸을 감싸고 있다. 그들은 함께 하는 일로 서로 얽혀있는 살아있는 십자가이다 |
. 두 사람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 시몬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십자가를 |
억지로 짊어지게 되었지만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나는 여기 있 |
는 내 형제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와 연대하겠습니다. 우리 둘이 짊어질 겁니다. 서 |
로 부축하며 짊어질 겁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들의 고통에 너무 |
깊이 관여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들은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는 |
이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 그리고 시몬, 그대는 나의 길을 함께 갈 것이다.' 우리 |
는 연대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말해주는 그림을 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고통 당하는 |
인간, 즉 '십자가를 진 사람'과 연대한다. 우리가 시몬처럼 짊어지게 된 십자가를 받아 |
들이고, 그 무게가 우리를 압박한다면 그때는 미리 그런 징후를 지녔고, 그 징후에 자 |
신을 내어준 분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받쳐주고 나와 함께 십자가를 |
짊어질 것이다. 그는 인간들의 형제이다. 그를 통해 우리의 고통을 나누면 고난의 길 |
을 넘어 희망의 오솔길에 이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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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림 진정한 이콘 |
베로니카는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루가가 전하는 유일한 언급은 예수께서 탄식하 |
는 여인들 곁에 잠시 머무는 장면뿐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14처 때문에 우 |
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4세기경부터 깊은 신앙심 때문에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하기 |
시작했을 때, 그 당시 생겨난 전설에 따르면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 |
다.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Vera Ikona, 이 이름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합성어이다) |
로, 진짜 형상을 의미한다. 전설은 이 여인을 고수한다. 그녀의 수건에 고난받는 자의 |
얼굴이 찍혔고, 이 수건으로써 치유효과가 생겨났는데, 황제 티베리우스가 이 수건 덕 |
분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붉은 옷의 여인은 루가가 말하는 예루살렘의 딸들 중 하나였 |
을 수 있다. 그들은 형장으로 이어지는 길거리에 서 있다.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걸어 |
가는 길을 내기 위해 병사들이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왜 그때 |
한 여인이 충동적으로 수건을 꺼내 땀과 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앞에 내밀었을까? 그의 |
얼굴은 막 이루어진 접촉에서 생긴 네거티브 사진처럼 뒤에 남아있다. 이 그림은 어떤 |
사명을 전하고 있다. 베일 뒤에 있는 여인의 눈은 계속 끌려가는 예수를 더 이상 바라 |
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흑인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빈 대접을 |
들고 음식을 구걸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양식이 필요하다. 온정에 대한 간 |
청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의 가르 |
침에서 그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 |
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 |
제7처 두 번째 넘어지심
당신과 더불어

제8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돌보기

제9처 세 번째 넘어지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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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처 옷 벗김을 당하심 누구의 것? |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위에서 아래까지 이은 곳 없이 통으로 짠' 예수의 하얀 옷가 |
지가 색상이 화려하고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한 조각'으로 된 예 |
수의 이 속옷을 놓고 병사들이 제비를 뽑았다. 이 속옷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나눌 수 |
없는 교회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독일 남서부의 |
트리어(Trier) 도시에 있는 성의(聖衣) 순례 때, 그곳에서 보게 되는 성의는 많은 사람 |
들에게 구체적인 인간 예수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이 되었다. 이런 해석을 배경으로 하 |
여 지거 쾨더의 그림이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
,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생각하도록 자극을 줄 것인가? 이 그림에서는 예수의 옷가지 |
주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된 세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앞쪽에 금빛 |
나는 제복을 걸친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있고, 그의 옆쪽으로 검은색 가운을 걸친 프로 |
테스탄트 목사가 있으며, 그의 맞은편에는 진홍색의 주교관과 옷을 걸친 로마가톨릭 |
주교가 있다. 이 세 사람 모두 함께 숭배하면서 예수의 옷 한 조각을, '그들'의 조각을 |
잡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유산에서 '그들'이 지니는 몫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
핏빛처럼 붉은 깃발을 든 검은 피부의 사람이 이 경건한 전원적인 풍경을 망치고 있다. |
묘사된 '성의'(聖衣)에 흐트러지고 쪼개지는 십자가 형태로 찢어진 틈이 보인다. 분리 |
된 채 있는 종파 사이에서는 복음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쪼갠 것에 대한 분노를 없앨 |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유산에서 자신의 몫에 자족적으로 만족해 |
하면서 그 유언의 본뜻을 망각하고 뒤로 제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유언이 여기에서는 |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 제시된다. 지나치기 쉬운 십자가의 그림자가 붉은 색 깃발을 든 |
흑인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은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적인 질문이 된다. 우 |
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들의 어려움과 다시 섞이지 않는 |
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오히려 그 해방시키는 구원의 힘을 죽이게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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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처 십자가에 못박히심 마주보고 |
'그곳에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
이 그림은 얼마나 낯선 광경인가! 골고타에서 눕혀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
모습은 없다. 이 그림은 우리의 감상 습관을 방해한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이 가는 |
방향을 바꾸고 마치 우리를 십자가의 길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그림은 우리로 |
하여금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한다. 팔다리를 뻗고 십자가에 누워 예수님의 눈으로 |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 하늘에서 죽은 검은 태양이 그를 내려다본다. 화환 |
형태의 얼굴들이 누워있는 자, 다시 말해서 나를 내려다본다. 마치 내가 해부될 준비 |
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갑옷으로 무장한 로마 병사 |
가 망치를 격렬하게 내리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즐기면서 |
도 깔보는 히죽거림 외에, 깊이 생각하는 표정도 찾아볼 수 있다. 당황하는 표정도 있 |
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있으며, 슬퍼하는 표정도 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얼굴 |
을 가린다. 또 어떤 사람은 성서 두루말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
있고 또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예언들이 그에게 암시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
찌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자신을 고난받는 예수와 일치시키고 '못 박힌 존재', |
즉 묶이고 못 박혀 고정된 존재에 대한 고유한 경험을 이 그림 속에 옮겨놓도록 화가 |
가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서 행동의 자유를 몽땅 빼앗지는 않아도 |
우리를 못박아 고정시키는 것으로 질병과 장애, 직업상 그리고 가족관계상 피할 수 |
없는 부담, 다른 사람들의 선입견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 |
이 곤경과 고난과 비참함 속에 못 박혀 고정되어 무기력하며, 내맡겨진 채 놀라서 쳐 |
다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들이, 민족 전체가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곳에서 사람 |
들이 구경하고 있고, 세계의 언론들이 방관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곤경을 알고 있 |
다. 그는 이런 곤경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우리 중에서 '형언할 수 없는 텅 빈 눈구 |
멍'(그림의 형상)을 바라본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의 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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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대학살(Holocaust)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인 대장의 외침,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 |
나!'는 복음의 혁명적인 내용, 즉 십자가형에 처해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
요약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로마의 종교적·정치적 권력자들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
생명의 하느님에 의해 부활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로마 황제에게 고용된 |
사람의 이 외침으로 복음은, 로마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정치적 선언과 |
배치된다. 십자가에 처형된 이 가련한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이 심지어 |
가장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의 삶에 얼마나 불멸의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계시 |
해준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삼는다. 예수와 율법 사이의 |
대립은 분명히 너무 극단적이어서, 권력자들은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그의 일을 끝내 |
려고 했다. 예수는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메시지와 행동은 종 |
교적·정치적, 유대적·로마적인 사회의 토대를 흔들어 놓는다. 그림은 성전의 휘장이 |
찢기는 모습인데, 마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께서 양쪽 담을 허물고 있는 강한 |
인상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을 제외시키고 그 자녀들을 죽이는 체제 |
속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율법을 부순다. 그게 로마의 율법이든, 시장경제의 율 |
법이든, 아니면 하느님 자신의 율법, 즉 시나이 산의 율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왜냐 |
하면 '안식일이 인간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
(마르 2,27)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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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어머니의 자궁 |
노을이 물든 밤중이다. 장소는 십자가 아래임을 알 수 없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 |
위에서 내려온 것과 같이 어둠도 위로부터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 |
에서 내려놓는 것과 장례 사이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마리아는 절망과 |
슬픔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저항한다. 한 손으로 그녀는 아들을 세우고 그의 버팀목 |
이 된다. 마치 그녀가 아들이 아기였을 때 똑바로 세우고 받쳐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
그렇지만 그의 숙여진 머리는 더 이상 똑바로 설 수가 없다. 피가 넘쳐흐르는 그의 |
머리는 무겁게 가슴에 안겨 있다. 그의 눈은 감겨져 있다. 그는 마리아를 더 이상 바라 |
볼 수 없다. 안겨있는 예수님의 자세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 있었던 아기의 자세이 |
다. 그리고 예수의 등에는 노아의 홍수 때, 방주로 돌아 온 비둘기처럼 부리에 올리브 |
잎을 물고 있다. 이것은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다. 그의 죽음이 세상을 구원하 |
였다는 증거의 표지이다. 마리아의 초록색 외투는 말씀에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
교회의 표상이다. 즉 절망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교 |
회 구성원들의 믿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개의 해골에서 어두운 눈구멍이 그림 감상 |
자를 쳐다본다. 해골의 눈들은 호기심에 차서 뻔뻔하게 바위틈을 통해 바라본다. 피 |
투성이가 된 이 사람의 죽음으로 죽음이 궁극적으로 극복되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
것 같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 |
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
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1이하). 이런 연관성이 두 개 |
의 해골(아담과 하와)로 암시되었다. 교부들의 전승에 따르면, 골고타는 아담의 무덤 |
이라고 한다. 열린 무덤 사이로 해골이 드러난 것은 부활의 표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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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처 무덤에 묻히심 누에고치 |
'그러고 나서 그는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다' |
때는 안식일 전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율법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을 금하 |
고 있다. 그런 사건의 진행이 어땠는가에 대해 전승은 아마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 |
을 중시했을 것이다. 처형 후 이제 누가 매장을 떠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
해야 했다. 심하게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외에, 행동할 수 있었던 남자 한 명과, |
아마도 안식일이 지난 후 죽은 자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를 생각해둔 여인들이 분 |
명히 있었을 것이다. 랍비 예수에 대한 성실함, 고통 속에서의 객관적 사고, 그의 죽은 |
몸에 대한 경외심 등을 이 텍스트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다음의 일이 모든 인간적인 |
경험을 부수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특히 정밀하게 재현 |
했을 것이다. 마치 무덤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매장 장면의 그림을 이것 |
말고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두운 공간, 즉 바위 무덤 안으로 인도되어진다. 수건으 |
로 싸매어진 예수가 있다.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붕대에 배어있다. 이 사람이 정말 |
로 몇 시간 전에 죽은 그 처형당한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그렇지만 캄캄해야 할 무덤 |
안에서 이 사람의 몸은 빛을 내고 있다. 죽은 자의 머리 위쪽에서는 부활의 신비의 빛 |
이 강렬하게 반짝이고, 조심스러운 표징 속에서 부활의 신비를 볼 수 있다. 신경에서 |
우리에게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는 짧은 신앙고 |
백을 하고 있다. 남녀 제자들의 증언은 부활절 이후의 만남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
그리고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매장과 안식일 다음날 아침 사이에는 신비가 놓여있 |
다. 약한 빛이 앞쪽으로 굴려진 돌 사이를 통해 무덤 안으로 스며든다. 첫 번째 연한 |
밝음은 떠오르는 태양의 전령이다. 이것은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 이상 |
이다.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끝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시작이다.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
새 날의 시작인 것이다. 부활절 아침의 예고는 모든 무덤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
또한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암시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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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기원(起源)과 완성 |
이 그림은 엘방엔 성령교회에 있는 유리화 중 첫 번째 그림과 여덟 번째 그림을 합성 |
한 것이다. 아래 부분에 있는 첫 번째 유리화에는 '기원'이라고 적혀 있다. 원자, 분자 |
구조에서 세포, 식물, 장미가 생겨나다가, 수십 억 년 후 진화의 정상에서 각 인간의 |
얼굴이 나타나게 된다. 인간은 아직 살아있지 않은 것의 잠에서 깨어난다. 샤르댕 |
(Teilhard de Chardin)의 신학에서 보면, 우리 세계의 물질은 점점 더 정신으로 변화 |
된다. 윗부분에 있는 여덟 번째 유리화는 '완성'이다. 최고 형태의 인간의 정신은 다른 |
정신과 교환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다시 작은 장미들로 구성되는 장미 속에 |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 그게 여자와 남자인지, 신부와 신랑인지, |
야훼와 그의 백성인지, 그리스도와 교회인지는 열려져 있다. 우리의 역사가 성령의 |
역사라면, 모든 시간의 끝에는 인간의 구상이 그 목표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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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아브라함, 유화 |
창세 15,1-6의 성서말씀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자식도 미래도 없는 아브라함 |
에게 하느님은 약속하신다.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세어보아라. 별을 셀 수 있는가?' |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믿었다 |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은 열려진 하느님의 약속을 받아들 |
였다. 헤브론의 밤은 아브라함의 삶에 있어서 '운명을 결정지은 시간'이었다. |
지거 쾨더는 가운데 보이는 가장 중요한 별과 함께 이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 별은 |
언젠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후손에게서 나타날(민수 24,17) 메시아(마태 2,2)이 |
다. '야곱에게서 나온 별'이 아브라함의 얼굴과 손에 빛을 던지고, 그의 녹색 옷에도 |
빛을 던지는데, 흡사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시는 생명의 숨결과 |
도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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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야뽁에서 야곱의 싸움, 유화 |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창세 32,29). |
창세기 32,23은 '바로 그날 밤'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야곱이 형 에사오의 영역과 |
구분되는 국경인 야뽁 나루를 건너던 밤이다. 일찍이 야곱은 술수를 써서 형에게서 |
장자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는 타향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을 했고 재산 |
을 늘리게 되었다. 강을 건너던 밤에 야곱은 자신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강 건너로 |
옮기고,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 그때 그를 덮친 미지의 사람과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인 |
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싸운 상대가 하느님임을 알게 된다. 그가 질문하면서 바라보 |
는 어두운 얼굴은 복수자의 얼굴이 아니다. 그 얼굴은 깊은 눈으로 선함을 발산한다. |
손으로 단단히 붙잡지만 잔인하지는 않다. 그 손은 오히려 붙잡고 받쳐주는 것처럼 |
보인다. '나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밤중의 |
싸움에서 야곱은 자신이 지금까지 전혀 하지 않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가 기도하게 |
된 것이다! 다음날 지평선에 동이 트는 것은 야곱의 삶이 새로 시작되는 것을 말해주 |
는 표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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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엘리아, 유화 |
'그곳에서 그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앉았다'(1열왕 19).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
체념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다. 까마귀들이 그를 먹여 살리고, 그에게 빵과 고기를 |
날라다주고 있다. 어느 날 엘리야는 모든 게 헛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
'주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
못난 놈입니다.' 엘리야는 야훼의 일을 변호할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 |
이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1열왕 19,10). 이 유혹은 그에게 과 |
도한 부담을 주고 더욱 그를 지치게 하였다. 이 그림은 엘리야가 겪는 자신과의 내면 |
적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엘리야는 믿음의 근원으로 향하는 길로 되돌아갔다. |
이때 그는 다시 계약의 하느님을 만나고 봉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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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유화 |
이 그림은 예수의 탄생 때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나타난다. 그림 중앙에 말씀 |
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셨다'(요한 1,14)는 성서말씀이 펼쳐 |
져 있고, '그리고 우리들은(und wir)'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그리고 구유 아래쪽에 |
펼쳐진 채 놓여있는 이사야 예언서는 햇순이 자라 나오는 이새의 그루터기에 대한 |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
난다'(이사 11,1)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온갖 재앙을 넘어서서 생명을 창조하는 |
하느님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선언 |
하신다. 그것도 조건 없이, 철회할 수 없게 선언하시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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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그레치오(Greccio)에서의 크리스마스, 유화 |
프란치스코는 1223년 그레치오에서 크리스마스를 구유로 기념했다. 벽 높이의 |
이 그림은 엘방엔 마리아 아동보육원의 프란치스코 소성당 뒷벽을 장식하고 있다. 성 |
프란치스코는 1223년 그레치오에서 베들레헴의 사건을 의미 있게 재현케 했었다. |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식어버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새롭게 불타오르게 |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치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보여주는 동안 성 프란치스코가 |
자정미사에서 어린아이를 변모시키기 위해 높이 들어올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렸 |
다. 그리하여 성체는 마치 그 어린아이와 융합되는 것처럼 일치하게 된다. 이것은 영 |
성체가 강생(육화)의 생생한 구현이라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 |
지거 쾨더, 죄인들과의 식사, 벽화, 산 파스토레(로마근교) |
로마의 독일어권 학생들을 위한 예비 교육기관인 산 파스토레(San Pastore) 건물의 |
식당 전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이곳은 속하는 영지(領地)이다. 학생과 손님들의 |
식사시간 때마다 이 그림은 무시할 수 없는 도전이 된다. 식탁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 |
은 오른쪽부터 제3세계의 사람·상류층 숙녀·대학생·어릿광대·눈먼 노파·창녀·랍비이다. |
그리고 뒷벽의 그림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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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야곱 우물가의 여인, 유화 |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 예수께서는 여인의 과거를 알고 |
있고, 그녀와 함께 우물가에서 가르침의 대화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그녀를 진지하 |
게 대해주면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
믿게되었다. 지거 쾨더는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녀는 깊은 우물 속을 들여 |
다보고 그곳에서 비치는 상을 보고 있다. 우물은 깊은 자아의 상징으로서, 놀라운 |
경험을 비춘다. 빛의 경계선 때문에 그녀와는 분리된 예수님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
차원을 제공한다. 시카르 출신의 여인을 원형의 열린 우물 입구에서 볼 수 있다. 위로 |
부터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우물에서, 즉 그녀 내면에서 이루어진 자아발견에 대 |
한 보상이다. 이 상징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람 |
은 바로 주님이며, 우리가 아주 깊이 내면을 성찰한다면 그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 |
다. 그리고 이 만남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물'을 길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 |
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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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호수 위의 폭풍, 유화 |
엄청난 폭풍이 닥쳤다.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다. 돛대가 부러졌으며, 노도 부러졌 |
다. 물을 퍼내기에는 양동이가 너무 작았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더는 소용 |
이 없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배의 뒤쪽 |
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제자들은 폭풍과도 같은 말로 예수를 깨워야 한다고 생각 |
했다. 그림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
않습니까?' 그리고 물결이 가장 사납게 들이닥치는 중에서도 그 분은 이렇게 말할 것 |
이다.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억제할 길 없는 불안 가운 |
데서도, 폭풍우 속에서도 그분에게는 절대적 고요함이 있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
'나는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다. 나를 믿어라.' 배는 그림 모서리 아랫부분과 교차하고 |
, 우리도 그 배에 타고있다. 즉 우리의 배이다. 우리의 불안과 함께, 또 우리의 하느님 |
과 함께 하는 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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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유화 |
이 작품은 예수께서 제시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왼쪽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검은 두 손에 |
서 예수님 십자가의 다섯 상처 가운데 하나인 못 자국의 상처를 볼 수가 있다. 시커먼 |
손바닥에 난 피 자국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지거 쾨더는 이 작품 |
에서 성서의 여러 곳에 나타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함축 |
적으로 표현하였다. 마태오 복음 25,31-46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구절을 |
그림의 제목으로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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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베드로의 닭, 유화 |
우선 호엔베르크의 공동묘지 그림이 보이고, 낡은 성물 보관소가 보인다. |
벽의 그림 '사자(死者)의 춤'은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의 손에 부러지는 시계의 추락하는 |
바늘을 보여준다. 죽음은 태양이 지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울고 |
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죄를 후회한다. 성목요일 밤에 있었던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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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호숫가의 아침, 유화 |
그날 밤, 제자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음성이 그들을 불렀다.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그들은 그의 말이 힘을 지니고 있음 뒤늦게 깨달았 |
다.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던 것이다. 요한만은 그 음성의 |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지닌 힘의 증명은 이 그림을 말해주는 틀에 불과하다. |
지거 쾨더는 제자들이 밝고 불그스름한 빛 속, 마치 모세가 타지 않는 불떨기 나무 앞 |
에서 한 경험을 그리고 있다. 그 빛이 제자들에게 닿는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 |
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배에서 내린다. 그가 바로 베드로이다. 그는 빛이 반 |
사되고 있는 곳에서 마치 홀린 것처럼 멈춰 서 있다. 불 위에 올려진 물고기와 모든 |
사람들을 위한 빵은 식사의 초대이다. 이것은 부활사화 중 하나로, 상징을 해석함으 |
로써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보았고, 그와 함께 식사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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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엠마우스(제대화), 유화,로젠베르크(독일) |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 |
지 않았다.' 그림에서 성서가 펼쳐져 있다. 성서의 뜻을 엠마오로 가는 여정 중에 함께 |
했던 부활하신 예수께서 깨닫게 해 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는 성서에 |
나타나는 메시아의 고난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
플라톤의 글을 성서 두루말이와 함께 놓고 있다. 탁자에 아직 빵이 있고, 그 자리에 |
예수님을 위한 포도주잔도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이와 동시에 예수님은 |
그들에게서 벗어난다. 빵은 그에게 있어서 계속 영원한 생명의 저당물이다. 다른 제 |
자는 포도주잔을 잡고 축복하기 위해 손을 쳐든다. 몸짓과 표징은 예수의 최후만찬과 |
주일의 성찬식을 가리킨다. 잔 속의 포도주는 예수의 피이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 |
흘리는 계약의 피이다(마르 14,24). 이것이 엠마오이다. 더듬고 구하고 길을 묻는 것 |
으로, 만남을 위해 열려있고, 새로운 것을 위해 열려있으며, 생명이 죽음에서 나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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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성령강림, 유화 |
바벨탑의 뼈대 속에 있는 인간들은 개인들로 남아있다. 그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 |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 또한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다. 위로부터 밝게 비추는 |
붉은 색이 다른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건물인 교회이다. 문이 열리고 베드로 |
가 복음서를 들고 나온다. 이것은 복음선포의 의미이다. 그의 뒤, 집안에는 마리아 주 |
위에 모여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불 혀의 형태로 내려오는 모습을 살펴 |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령강림의 사건이 지속적으로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다. |
즉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주교, 교황 요한 23세 |
와 같은 예언자적인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성령강림은 성령강림이 |
아닐 것이다. 그 위층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한 청년은 |
그리스도의 깃발을 흔들고 있고, 가운데 남녀는 '땅에 평화'라는 글이 적힌 현수막을 |
펼치고 있다. 미사 때의 복사는 교회에 있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그는 창 밖을 향해 |
분향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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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주님은 나의 목자 |
다윗 왕은 왕관 대신 유대인의 기도 수건을 두르고 있다. 축복 받은 하프 연주자이자 |
노래를 만드는 이 사람이 기도를 하고 시편 23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다.' 다윗 왕은 커다란 곤경에 처해 있고, 악의 손길을 감지한다. |
그러나 그는 '하느님이 나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고 신뢰한다. '그 분은 |
나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네'(중앙). '그 분은 나를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네 |
'(위쪽). '그 분은 나의 갈망을 채워주시네'(빵과 포도주). '그 분은 나를 성실히 |
인도하시네'(손). '내가 음산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지라도'(폐허), '나는 어떤 재앙도 |
두렵지 않네. 당신이 내 곁에 계시기 때문이네'(장미). 다윗의 목자 모습이 이제 선한 |
목자 예수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그의 얼굴이 손에 나타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확 |
신을 주는 지팡이'가 된다. 그리고 물고기, 빵, 포도주가 넉넉히 차려진 식탁은 엠마우 |
스와 호숫가의 부활절 식사를 상기시킨다. 진실로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쉬 |
울 것 없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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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내가 잠든 새벽을 흔들어 깨우리라,유화 |
시편 57의 기도하는 사람은 '당신께 이 몸을 숨기렵니다'라고 말하고 비탄에 잠겨 |
'당신이 내 발 앞에 그물을 쳤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
붙잡혔다고 느낀다. '내 영혼아, 잠을 깨어라. 비파야 거문고야 잠을 깨어라.'(이 그림에서는 만돌린이 보인다) 절망했던 인간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마음속을 볼 수 있게 |
해준다. 우리는 그가 이 그물들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했음을 알 |
게 된다. 그는 기도 중에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내 마음은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때 |
때로 자기 의지의 힘을 모으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맞서 싸우며, 최소한 기도할 필 |
요가 꼭 있다. 우리는 물론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 |
는 이 무명의 남자처럼,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노래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 분께 |
감사하려고 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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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벽을 뛰어넘기, 유화 |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어떤 담이라도 뛰어 넘을 수 있고, 나의 하느님께서 힘이 되 |
어주시면 못 넘을 담이 없사옵니다'(시편 18,29)의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
모든 인간의 삶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들을 벽으로 나타낸 것이다. |
견디기 어려운 운명의 충격, 요구할 수 없는 결단, 불안과 적대관계, 뿌리뽑을 수 없는 |
선입견, 나쁜 질병, 죽음 등이 담으로서 존재한다. 어른일 법한 기도하는 사람을 화가 |
가 악동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것은 '너희들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이라는 |
예수의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등불과 빛은 믿음에 대한 상징이고, 하느님을 나타 |
내는 표시이기도 하다. 복사는 양손으로 전례 때의 횃불을 꼭 붙들고 있다. 마치 세계 |
기록을 깨기 위해 높이뛰기를 하는 것 같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 벽 세 개를 뛰어넘는 |
데 성공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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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그가 우리 집 담밖에 서 있다, 유화 |
아가서 2장의 성서말씀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수직선이 그림을 안과 밖으로 나눈 |
다. 남자애인은 밖에 서서 연인에게 장미를 들고 구혼하며 초대의 신호를 기다린다. |
그녀는 이와 달리 안에서 그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가 하려는 말을 잔뜩 긴장해 |
서 엿듣는다. 그녀 위에 있는 창문은 반은 닫혀 있고 반은 열려 있다. 신부가 베일로 |
얼굴을 가리면서 동시에 작은 틈새를 열어두는 것과 같다. 이는 두 연인 사이의 긴장 |
을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서구절을 인간의 사랑에 대한 찬가로 본다. 또 어떤 |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그 이상을 본다. 하느님은 자신의 인간과의 관계를 인간이 |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로만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
하느님은 밖에 서서 사랑이 자신을 들여보내기를 기다리는 분으로 드러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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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장미를 든 어릿광대, 유화 |
지거 쾨더가 그렸던 광대, 어릿광대, 또는 익살꾼들의 경우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 |
모두 슬픈 얼굴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 지거 쾨더는 결코 삶의 아름 |
다운 것들을 싫어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서커스 묘사나 다른 많은 작품 |
들에서 이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장미를 든 어릿광대〉는 1992년에 그렸다. 게다가 |
'지거 쾨더의 그림들이 담긴 성서'라는 대 작업과 더불어 이제는 더 이상 고통스런 |
표정을 띠지 않는다. 고통에 찬 표정은 확실히 우울한 표정으로 변화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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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대성당, 유화 |
프랑스 대성당 및 城의 예술기행을 그린 것이다. 작가에게 남아있는 것은 기억들이다 |
시간은 기억들을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로 농축시킨다. 그렇게 생겨난 <대성당>에는 |
샤르트르(Chartres) 대성당의 푸른 색 유리화 <아름다운 성모자>, 파리 세느강에 |
있는 시테섬과 <노트르담 Notre Dame>의 윤곽, 선악과를 한 손에 들고 있는 <하와> |
형상 등이 서로 섞여있다. | |
♣ 지거쾨더 약력 |
지거 쾨더 Sieger K der 1925.1.3. 독일 바서랄핑엔(Wasseralfingen) 출생. |
1931-1935 바서랄핑엔 초등학교 |
1935-1943 엘방엔/야그스트(Ellwangen/Jagst) 김나지움 |
1943-1945 근로봉사대 근무,병역근무, 전쟁포로 |
1946-1947 슈바벤 그뮌트(Schw bisch Gm nd)국립 귀금속 전문대학에서 금속세공,은세공 전공 |
1947-1951 슈투트가르트 예술 아카데미에서 스케치, 작품 분 류, 그림, 예술사 전공 |
1951-1952 튀빙겐 대학에서 영어영문학 전공 |
1953 슈투트가르트에서 예비교사 근무 |
1954-1965 알렌(Aalen)의 슈바르트(Schubart)김나지움에서 미술교사로 근무 |
1965-1970 튀빙겐 대학, 뮌헨 대학에서 가톨릭 신학공부 |
1971 로텐부르크(Rottenburg) 신학교 졸업 1971 사제서품 |
1971-1975 울름 교구 성 마리아 수소(St. Maria Suso) 교회 보좌신부 |
1975-1995 호엔베르크(Hohenberg), 로젠베르크(Rosenberg) 교회 주임신부 |
1995 은퇴 후 엘방엔에서 살고 있음 지거 쾨더는 독일 출신의 신부이며 화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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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미술을 전공한 후에 신학을 공부했기에 그림을 통해 풍부한 묵상거리를 |
제공하고 있습니다. |
SK라는 사인이 붙은 그의 작품은 슈바벤 고향의 교회에서 비롯하여 로마 근교에있는 |
산 파스토레(San Pastore) 교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화 및 세속적인 작품들에서 나타납니다. |
1995년 미세레오르(Misereor)를 위해 만든 단식포(斷食布)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
지거 쾨더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유명한 '종교적'인 화가들에 속합니다. |
'성서'에 대한 삽화, 제단화, 십자가의 길 그림, 교회나 기타 건물들에 있는 유리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창조성은 1950년대 초부터 수많은 전시회나 출판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
있습니다. 그의 성화들은 성서의 내용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많은 작품에서 관람자가 |
주체로서 참여하게 초대하고 있습니다. | |
출처 : 평화의 사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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