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중제26주간월요일(090928.월)
<연중 제26주간 월요일>(2009. 9. 28. 월)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것이라고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좌의정, 우의정 한 자리씩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9월 28일의 복음 말씀에서는 '누가 더 높으냐?" 라는 문제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욕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제자들을 타이르십니다.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작은 이, 약한 이, 어린이를 잘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서 작은 이, 낮은 이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스스로 낮은 자리로 가라는 가르침입니다.
(매일미사 책의 '오늘의 묵상'에 있는 해설은 잘못된 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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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수산나 재판 장면을 보면
아직 나이가 어린 다니엘이 원로 자격을 인정받아서
재판 결과를 뒤집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에서
수산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 주인공이고,
어린 나이에 이미 성령에 가득 찼던 다니엘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어린 다니엘을 원로로 인정한 그 자리의 어른들도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한국의 103위 성인들의 명단을 보면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양반과 상민이 섞여 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의 높고 낮음이 성인들 사회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유유서, 반상의 차이, 남녀의 차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성덕만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직책, 나이, 서열, 신분, 남녀... 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서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고 싶다면, 즉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가장 낮은 자리로 가면 됩니다.
정확히 말해서... 높은 사람일수록 낮은 자리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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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경우는 잘 모르겠고...
한국 남자들 사이의 서열 문화는 분명히 문제가 많습니다.
직책과 계급, 선후배, 나이, 밥그릇 수...
이런저런 서열이 혼합되어서 사회생활을 아주 복잡하게 만듭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에
나이가 적은 선배와 나이가 많은 후배 사이의 갈등이 은근히 있었습니다.
서로 존중하지 않으면, 서로 기분이 나빠지게 됩니다.
저는 아주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신입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입생 시절,
저의 동기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과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의 나이 차이는
열다섯 살 차이였습니다.
저는 반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같은 반에서는 호형호제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상급반과 하급반 사이에서는 좀 껄끄러운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신학교 5학년 때, 제가 교구 신학생회 회장이 되었는데,
저는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나이 적은 선배와 나이 많은 후배가 서로 존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신부들 사이에서의 서열은 서품 순서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나이를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서품 순서에 따른 서열이 먼저이지만, 나이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저보다 먼저 서품 받은 선배 신부님들 중에는 저보다 나이가 적은 신부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몇 명은 저에게 자주 반말을 합니다.
(어느 쪽이 더 나이가 많은지를 모르거나,
서열만 생각하고 목에 힘을 준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제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엔 되게 기분이 나빴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감각해지긴 하는데... 그래도 불쾌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끔 마음 속으로, 저걸 그냥 콱! .... 할 때가 있긴 있지요. )
바로 그런 마음을 없애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명령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아야지요.
서열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서열을 의식하는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나이를 의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그런 세속적인 서열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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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명단을 보면 12살짜리 성인도 있고,
천민 출신 성인도 있고,
이름도 없이 그냥 '소사(과부)'로만 이름이 전해지는 성녀들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런 것에 아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성인들 사이의 그런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성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도 그런 문제를 없애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서열 문화는 없애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당연히 없어져야 합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에서의 직업이나 직책이 성당 안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어져야 합니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성당에서는 한 사람의 신자일 뿐입니다.
성당이든 예배당이든 대통령에게 특별석을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 높고 낮은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그냥 봉사자입니다.
성직 계급 안에서의 서열 문화도 다시 생각해볼 문제가 많습니다.
교황은 자필 서명을 할 때, '종들의 종'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교황이 종들의 종이라면, 신부들은 바로 그 '종들'입니다.
높고 낮음이 역전되어 있는 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교회입니다.
세속에서의 높고 낮음과는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저 단순히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을 정반대로 바꾸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지를 생각하고, 본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황태자가 천민의 계급으로 내려와서 천민이 되어 사는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세상에 내려와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 이상 더 낮출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낮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자존심 상할 일이 많기는 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참아야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존심은 다 쓸데없다고 하시니, 버려야겠지요.
중요한 것은... 더 높은 성덕을 쌓는 일, 그것뿐입니다.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일이고,
성덕을 쌓는 일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길로만 가셨으니 우리도 낮은 길로만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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