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통의성모마리아기념일(090915.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2009. 9. 15. 화)
<십자가>
복음서라는 책은,
성모 마리아의 '주님 뜻대로' 라는 응답으로 시작되어서
예수님의 '아버지 뜻대로' 라는 응답으로 마무리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뜻대로' 라는 응답은 곧 십자가형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주님 뜻대로' 라는 응답은 곧 일생 동안의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통을 십자가로 쉽게 표현하는데,
아무 고통이나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니고,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
바로 그 고통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모님도 일생 동안 십자가의 삶을 사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수직선은 하느님 사랑을 나타내고,
십자가의 수평선은 이웃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겪는 고통,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겪는 고통,
그 사랑과 고통이 십자가입니다.
저는 제 몸의 병을 십자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도 십자가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전염병, 전쟁, 흉년 등으로 인한 고통도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런 고통들은 인류가 힘을 모아서 제거해야 할 '악'입니다.
나이 들고 치매에 걸린 노부모님께 효도를 다 하면서 겪는 고통은 십자가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내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가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서 고통을 겪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죄에 대한 보속입니다.
음주운전자 때문에 사고를 당해서 다친 것은 십자가가 아니지만,
그 사고의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도 신비입니다. 즉 우리가 다 이해하기는 어려운 수수께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도록 강요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해서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소극적인 태도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받을 수 있는 많은 은총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면,
또 거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죄가 됩니다.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고해성사를 보아야 할 죄가 됩니다.
예수님도, 성모님도 십자가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능동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 분이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사랑이 없다면 십자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십자가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받아들이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효도를 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십자가라면,
자녀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가 겪는 고통도 십자가입니다.
효도란 부모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고통보다도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고통보다도 큰 법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은
희생, 고통보다도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효도'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싸가지 없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율법에는 불효자식은 사형시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효도를 하지 않는다고 처벌하는 법률은 없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그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성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제법 성실하고 열심한 신자라고 소문난 사람들 중에도
효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를 가끔 보았습니다.
효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은 잘 한다고? 그건 거짓입니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기를 거부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어린 자녀를 버리거나 학대하는 부모들... 부모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그런 가정의 깊은 속사정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가장 기본적인 사랑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앞에 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9월 14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배하고 묵상하는 축일이었습니다.
9월 15일은 성모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묵상하는 축일입니다.
그리고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란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십자가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서 본당마다 여러 가지 행사를 할 것입니다.
순교자 현양대회, 성지 순례, 기타 등등...
저는 해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순교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것을 우리 삶에서 실천하자는 행사들인데...
행사만 있고, 십자가는 없고,
고통은 있는데, 사랑은 없고...
몇 년 전, 언젠가 교구 행사에서,
햇볕이 아주 강렬하게 내려 쪼이는 날이었는데,
사제단석에는 천막이 있었고, 신자들은 그냥 땡볕에 앉아 있었습니다.
미사 중이라서 신자들은 양산도 펴지 못했고, 그냥 묵묵히 그 고통을 견디어냈습니다.
참으로 미안하고 민망한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서 천막 밖으로 나가서 앉았습니다.
나중에 어떤 신부님이 그날의 상황을 공개적으로 지적했습니다.
신부들은 그늘에 앉아 있고, 신자들은 땡볕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안 좋더라고.
저는 아예 행사 자체를 하지 말자고 건의했습니다.
땡볕에 앉아 있던 신자들에게는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할 좋은 기회가 되었겠지만,
그늘에 앉아 있던 사제단은???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할 기회도, 이웃 사랑을 실천할 기회도 다 놓친 것입니다.
(사제단석에만 천막을 치는 그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싫어하셨던 권위주의입니다.)
십자가란 하느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란 사실 '사서 고생'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면 어리석고,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란 그런 것입니다.
자기 한 몸 편하게 하고 싶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누르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좀 힘든 것을 참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전주의 치명자산 성지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든 성지일 것입니다.
산 밑에서 산 위의 순교자 묘지까지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몇 걸음만 걸어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성지들과 비교할 때,
치명자산 성지는 대단히 힘든 성지입니다.
가끔 불평하는 신자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전주교구는 왜 이렇게 성지개발을 안 하느냐고,
신자들이 좀 더 쉽게 순교자 묘지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는 그런 신자들에게 반문합니다.
케이블카를 설치하자고 건의할까요? 라고.
만일에 케이블카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실제로 나온다면
저는 앞장서서 반대 운동을 할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쳤는데,
삼십분 정도 산을 오르는 것도 힘들어 한다면, 성지 순레는 대체 왜 하는 것입니까?
일상 생활에서의 작은 희생, 작은 고통이 쌓여서
십자가가 되고, 순교가 됩니다.
좀 더 편하게, 좀 더 안락하게.... 라고 속삭이는 것,
사서 고생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 그건 다 사탄의 유혹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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