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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톨릭 성지(전주) 13 - 치명자 산
도구 Ludovicus
2009. 8. 29. 11:39
가톨릭 성지(전주) 13 - 치명자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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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동정 부부 이 루갈다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루갈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돼 있는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유중성,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용지면 남정리)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 4월 19일에 이곳으로 옯겨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에 이 묘소를 개장,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진주 유씨 소재공파(素齋公派) 8대손인 유항검은 1784년 권일신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성직 제도에 의해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고 고향인 전주 초남리(현재 전북 완주군 이서면 조남)에 내려와 호남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유항검은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죄가 됨을 깨닫고 이를 시정키 위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 편지를 내게 했으며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당한 유항검은 대역 부도(大逆不道)죄로 능지 처참형을 받고 전주 감영으로 다시 이송, 1801년 10월 24일 46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또한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동정 부부로 유명한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과 동생 유관검이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유항검 일가는 지상의 모든 삶을 영생의 세계로 옮겼고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의 확신은 일가의 단종을 가져왔다. 조정은 이들의 흔적을 아예 없앨 요량으로 대역 죄인의 집을 헐고 집터를 깊게 파 연못을 만들어 버리는 파가 저택(破家猪宅)의 형을 내렸다.
전주 초남리에서 시작된 유항검 일가의 길고도 먼 여정은 이렇게 치명자산에서 마쳤고 그 길은 시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신앙의 후손들은 생명은 물론 가문의 단절까지도 감수하며 천주를 섬겼고, 그 흘린 피의 대가로 호남 천주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던 유항검 일가의 고결한 신앙을 구비진 능선을 따라 산을 오르며 되새기는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전주 숲정이와 치명자산
숲정이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사적지였다. 이곳은 신앙 선조들의 순교 열정과 함께 천상의 영복을 얻은 기쁨, 피로 적셔진 진토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 내내 신자들은 그 자리를 잊을 수 없었고, 신앙의 자유를 찾은 뒤에도 자주 이곳을 순례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이 숲정이 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에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아나돌)이 숲정이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였다. 이후 1935년에는 전동 본당의 이학수(바오로)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비를 건립하였으며, 1960년에는 이곳 이웃에서 해성 중고등학교가 개교하였고, 1968년에는 순교 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또 1984년에는 숲정이 순교 터가 지방 기념물 7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시화의 물결로 1989년에 해성학교가 이전되고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진북동 1144-1번지)에 새로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전주시로 들어와 전주천 변에 있는 진북 초등 학교를 찾으면 된다.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7구의 순교자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각각 담고 이름을 써서 달았다. 그런 다음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재목을 구하기 위해 사두었던 성당 동쪽 기린봉(306m) 자락에 있는 ''치명자산''(전주시 대성동 산 11번지)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으니, 그때가 1914년 4월 19일이었다. 이어 1949년에는 전동 성당 신자들이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건립하고 교구장 김현배 신부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가졌으며, 1984년에는 이 지역이 지방 기념물 69호로 지정되었다. 전주교구에서는 이를 계기로 치명자산 개발 계획을 세운 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5년 기념 성당을 완공하였다.
지금까지 이곳 사적지에서는 크고 작은 기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된 류항검, 류중철, 이순이 등의 시복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석양이 질 때 드러나는 이곳 언덕의 기념 십자가 옆에 있는 바위는 순교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과 비슷하다. 이처럼 치명자산은 더 많은 양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오늘도 전주 시가지를 내려다 보고 그곳에 서 있다. [차기진, 사목 250호(1999년 11월호), pp.120-122]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출처 : 미사의 종소리
글쓴이 : ★청하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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