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복음 마르코 9,2-10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지난 월요일에는 어떤 신부님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교포사목을 하고 계시는 저의 후배 신부로 휴가차 한국에 잠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형, 우리 남아공 공동체 사람들이 형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보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내가 형을 잘 안다고 했지. 그런데 믿지를 않는 거야. 형처럼 유명한 신부를 내가 알 리 없다는 것이지. 따라서 새벽 묵상 글에 한번 내 이야기 좀 써 주라. 나와 형이 친하다는 걸 말야.”
이 자리를 빌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동체 형제자매님들께 말씀드립니다. 오상민 신부와 저는 무척 친합니다. 그래서 자주 전화 연락도 하고 만남도 갖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제가 오상민 신부와 친하다는 사실을 얼마나 주님께 감사해하는 지 모릅니다. 훌륭한 신부님, 재주도 많은 신부님과 함께 좋은 공동체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될 때에는 더욱 더 믿기 힘들지요.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부족한지요?
저는 자전거를 자주 탑니다. 그저께 그렇게 더운 날씨에도 저는 자전거를 끌고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신자들이 깜짝 놀라며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이렇게 더운 날에 자전거 타는데 괜찮겠어요?” 그러나 자전거 타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자전거의 속도 때문에 오히려 시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부족하다는 또 한 가지의 증거. 작년까지 저희 본당에는 보좌 신부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아이들 캠프에 전혀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당 미사를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올해부터 보좌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이들 캠프에도 함께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네요. 왜냐하면 아이들을 담당하는 보좌신부님이 캠프에 가야하고 저는 본당에 남아서 미사를 해야 하니까요.
우리의 생각이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 생각이 꼭 맞다고 하면서 남에게 주장해서만은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모습을 본 제자들은 바로 이 자리에 눌러 살자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이러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자신의 생각이 물론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을 듣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을 듣는 우리들이 될 때,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항상 주님의 거룩함을 체험하면서 기쁨의 시간 행복의 시간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련이 없는 사랑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토마스 아 켐피스).
자신을 용서 하는 것(‘좋은 글’ 중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도 어렵지만 자신을 용서하기란 더욱 어렵다.
자신이 못난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히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은 과식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거의 안 먹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모든 관계를 하나하나 파괴해 나가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가난과 질병 속에서 헤어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산다.
이런 행동의 밑바닥에는 ‘참 못할 짓 많이 했어'라든가
‘내가 잘못했지' 아니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행복하게 사냐고'라고 속삭이는
신념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병을 앓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자격이 없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당신이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일로 이미 충분히 고통 받은 셈이다.
그런데 왜 고통을 늘려야 하겠나?
한두 해 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쓸데없는 죄책감은 벗어던져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듯이
건강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노력을 쏟아야 한다.
이건, 그만한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