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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18주간수요일(090805.수)

도구 Ludovicus 2009. 8. 5. 06:1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2009. 8. 5. 수)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8월 5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15,21-28입니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딸을 고쳐달라고 청하고,

예수님께서 냉담하게 거절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대답도 안 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나는 이스라엘 집안의  양들에게 파견되었다.' 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는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해서 결국 바라던 것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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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

감독이 선수들에게 대놓고 '아줌마'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건 빈정거림도 아니고, 모욕하려는 뜻도 아니고,

선수들을 자극해서 분발시키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 선수들이 분발하게 됩니다.

말 한 마디의 힘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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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가나안 부인의 만남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 :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딸을 고쳐 달라고 호소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존칭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가나안) 여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런 존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아쉬워서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 싶은 마음 때문에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한 마디도.

           예수님의 침묵은... 말 없는 가르침입니다.

           남의 말을 흉내 내지 말고 너 자신의 말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나섭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라는 제자들의 말은

           돌려보내든지, 도와주든지 하시라는 재촉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상 그 여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은 글자 그대로 보면 유대 민족을 뜻하지만,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들'로 넓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 여자가 아직은 하느님을 갈망하는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가 지금 바라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저 자기 딸을 고치는 것뿐입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을 찾는 것은 의사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여자에게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2단계 : 가나안 여자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빼고,

           그냥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겠지요.

           그래서 뭔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제 딸을 포함해서,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 여자는 딸 이야기도 빼버리고,

           그냥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모든 딱한 처지를 도와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여자는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가혹하게 들립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이것은 거절의 말씀이고, 모욕하는 말씀입니다.

           가나안 여자를 강아지라고 부른 것이니...

 

           핸드볼 국가대표 감독이 선수들을 아줌마라고 부른 것은

           선수들이 진짜로 아줌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분발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어떻든 선수들은 실제로 아줌마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강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도 모르는 존재들이라고 멸시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섞여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의 뜻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 표현대로 강아지를 강아지라고 부른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자녀가 될 것인가, 강아지로 남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하느님의 자녀로 들어올 것인가,

           아니면 그냥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으로 남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지만,

           은총이 은총으로 작용하려면, 은총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도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7장 6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당장 눈앞의 아쉬운 일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3단계 : 가나안 여자는 꺾이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대단한 여자입니다.

           아마도 딸을 고치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딸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상태를 꿰뚫어보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직 하느님을 잘 모르고, 그동안 믿지 않았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믿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대답은

           자신이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개만 아니라면,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애완견으로도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동시에 딸에 대한 간절함과 지난 시절에 대한 겸손함을 나타냅니다.

           이제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수준으로 자신의 믿음을 끌어올렸습니다.

           자녀라고 하든 강아지라고 하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믿음의 자세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집 나갔던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서 했던 행동과 비슷합니다.

            "저는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전에 그가 속으로 한 말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루가복음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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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그 여자의 딸이 나은 것은 그냥 에필로그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예정하셨을 것입니다.

흔히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시험했다고 해석하는데,

예수님이 몰라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그 여자의 믿음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련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갔고,

필요한 수준까지 자신의 믿음을 끌어올렸습니다.

믿음이 더 깊어지고 성숙해졌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 모욕감... 그건 시련의 일부입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속을 꿰뚫어보셨다는 것.

입에 발린 말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여자가 맨 처음에 사용한 '주님'이라는 존칭과

마지막에 사용한 '주님'이라는 존칭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남이 하는 대로 흉내 내는 것과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서 부르는 것이 같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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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잘 하는 것과 말을 잘 하는 것은 상관 없습니다.

말을 잘 해서 온갖 좋은 말을 다 집어 넣어서 화려한 기도문을 만드는 것,

그건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게 기도입니다.

 

믿음을 말로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물론 박해시대 때에는 목숨을 걸고 말로 고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말로만 고백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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