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중제18주일(090802)
<연중 제18주일>(2009. 8. 2)
<생명>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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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때 흔히 한두 번씩 묻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을 얻었습니까?
그 질문에 너무 깊이 빠져서 출가해서 산속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속세를 등지고 어딘가로 가는 사람도 있고...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그냥 덮어두고 사는 사람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해답과 결론을 내리고 혼자서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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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 살고, 돼지도 살고, 나무도 살고, 풀도 살고,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도 삽니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적어도 그런 동식물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생존'과 '생활'의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국어사전의 뜻 말고, 그냥 글자에서 느끼는 그대로...
식물과 짐승들이 산다고 하는 것은 '생존'이고,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생활'이라고 제 마음대로 정의를 내립니다.
(여기서 생존이란,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 말고, 일상생활에서의 생존.)
즉 살아남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본능적인 것. 남이야 죽든 말든.
그러나 '생활'은 살아남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예술이라든지 발명이라든지... 그런 창조 활동을 하고,
모두를 위해서 유익한 일도 하고, 남을 위해서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기도 하는,
그런 인간의 '살아 움직임'을 '생활'이라고 정의를 내려 봅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생존입니까? 생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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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 중에는 생존 본능과 종족 보존 본능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사는 것처럼 산다고 만족할지 모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추할 뿐입니다.
남을 해쳐서 자기 쾌락을 즐기는 범죄자... 짐승 수준의 삶이지요.
남을 해치지는 않지만 자기 몸을 팔면서 쾌락을 즐기는 삶이라면...?
그건 소중한 자기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니 역시 짐승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있어야 인간입니다.
지금 뇌사상태에 빠져서 식물인간의 모습으로 누워 있어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왕성하게 살아 돌아다니고 있긴 하지만 아메바 같은 단세포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단세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든, 한 번 살다 죽으면 그만인 인생, 즐기면서 살다 죽겠노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아직 젊고 건강할 때 큰소리치는 것일 뿐입니다.
늙어서 즐길 기운도 없으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그럼 도대체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자기 내부의 영혼을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정신분석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신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영혼.
육체도, 본능도, 감정도, 이성도, 마음도 다 초월해서
자기 내부 깊이 숨어 있는...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영혼입니다.
영혼이 없다면 ... 건전지로 움직이는 로봇이 될 수도 있고,
본능대로 움직이는 짐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설 '타잔'의 오리지널 원전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본적이 없고
밀림에서 짐승들과 똑같이 짐승처럼 살던 타잔,
그는 다른 짐승을 사냥해서 죽이고 그 고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사람과 마주쳤고, 그를 때려눕힙니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그 사람의 고기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합니다.
이건 아니다, 라고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밀림에서 살던 타잔에게 인간으로서의 이성, 양심,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본능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인간이었던 것은 그에게도 영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겪은 후에 그는 차츰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자기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의 모습을 한 짐승들을 봅니다.
가르칠 수 있다면 가르치고, 바로잡을 수 있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지금 하는 말은 범죄자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을 죽여 자기가 살겠다고 덤비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치??
정치라는 것이 남을 죽여서 자기만 살겠다는 것이면, 그런 정치는 없애야 합니다.
진정한 정치는 모두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
남을 죽이고 자기만 사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라면 그것도 없애야 합니다.
진정한 경제란 모두 함께 잘 살자고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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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정한 생명의 원천, 진정한 생활의 원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을 죽여 자기만 살겠다고 덤비는 것이 짐승의 생존이라면,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아주 가끔 짐승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어미로서의 본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인을 위해 희생하는 '의견'의 충성도 사실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는 건 인간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행동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이타적이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한 이는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특별한 것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력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를 예로 들면,
예수님을 모르기 전에도 조선에는 훌륭하고 위대한 성인들이 있었습니다.
천주교가 들어왔다고 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지상 천국으로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남인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서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찾은 것은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생명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의 근원, 영혼의 근원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건 철학이 아닙니다. 종교입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근원을 찾았고, 그래서 그 근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았고, 그래서 순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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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아니더라도, 예수를 몰라도, 살기는 삽니다. 더 훌륭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뭔가가 있습니다.
하루 세 끼 먹는 밥에서 얻지 못할 어떤 힘,
이 세상에서도 얻지 못하고, 사람에게서도 얻지 못할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을 저는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부릅니다.
그냥 대충 살다 대충 죽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면 그냥 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게 아니다.' 라고 느껴진다면... 자기 삶의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단세포 동물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본능과 쾌락에 몸을 맡기고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생존 본능과 종족 보존 본능만으로 사는 인생이라면... 그건 너무 딱하고 불쌍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언젠가는 모두 끝납니다.
그점에서 짐승과 식물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사람의 몸이 썩어 먼지로 변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생명력이 내 안에서 머무르는 곳, 그곳이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새로운 철학 이론이나 제시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저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 끝나버린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인간에게 전해 주신 분입니다.
그걸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생명을 전해 받은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 그리고 죽는 모습입니다.
사도들, 순교자들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그 생명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길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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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는 예수님께로 가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영성체는 예수님의 생명, 하느님의 생명력을 내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길입니다.
그래서 성체는 생명의 양식이고, 성체성사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살기를 원합니까?
지금 원하는 것이 생존입니까? 아니면 생활입니까?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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