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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녀마르타기념일(090729.수)

도구 Ludovicus 2009. 7. 29. 07:16

<성녀 마르타 기념일>(2009. 7. 29. 수)

 

<고통, 슬픔... 그러나 믿음>

 

예수님의 친구 라자로가 죽었고, 라자로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가지 않으셨다가

그가 죽은 다음에야 가십니다.

마음속으로 작정하신 바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라자로가 앓고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희망했습니다.

 

마르타의 말이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나 서운함을 나타낸 것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그런 마음을 표현한 것보다는 일단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르타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을 죽은 라자로를 살려달라는 청원으로 보아야 할까요?

복음서를 아무리 되풀이 읽어도 마르타나 마리아가 라자로를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께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청원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병자를 고쳐달라는 청은 많이 드렸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는 청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사람들의 청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에 의한 기적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드린 말씀의 뜻은,

비록 라자로는 죽었지만 주님에 대한 자기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도 알고 있다.' 라는 말은 '변함없이 지금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르타의 신앙고백이 계속 이어집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가치와 의의를 가집니다.

그래서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복음서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신앙고백이 사도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와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별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의 부활에 대한 표징을 미리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이 되었겠지만,

그것이 주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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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통해서 성녀 마르타가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것은

슬픔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큰 고통이고 큰 슬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고통과 슬픔 속에서 믿음이 흔들립니다.

예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슬픔에 잠겨 울었지만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가 자기 뜻대로 되어야만 믿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믿어야 믿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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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슬픔 속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기도한 대로, 희망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더 큰 고통과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제로 살면서 체험한 기적은 많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나 큰 사고로 죽을 위험에 있던 사람이

거짓말처럼 다시 건강해지는 것을 여러 차례 체험했습니다.

분명 기적이었습니다.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저도 기도했고, 가족들도 기도했고,

많은 이들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죽을 병에 걸려서 그냥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큰 사고를 만나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많이 기도했지만 그렇게 끝나는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신학생 시절 제 옆 침대의 동기생도

부제품을 앞두고 쓰러져서 일년을 누워 있다가

동기들이 사제품을 받을 때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서 신학교 전체 신학생들이 정말 많은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런 일은 그냥 흔하게 일어나는 인간 세상의 일들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이루어지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하고 화를 내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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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건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기적이란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라자로를 살리실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르타나 마리아의 청을 듣고 행하신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만이 하느님의 방식은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도, 슬픔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에게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런 고통과 슬픔을 겪어보지 않았나보다, 라고...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이 세상에서 한 번도 슬픔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든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슬픔은 겪어야 하고,

살다보면 누구라도 이런저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저는 제가 직접 겪었기 때문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는 은총을 많이 체험하긴 했지만,

전혀 기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음을...

(물론 많은 묵상과 기도가 뒤따라야 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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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뭔가를 해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울고 있을 때 예수님도 울고 계심을 바로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파할 때 예수님도 아파하심을 바로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걸 깨달을 수만 있다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마도 마르타와 마리아에게는 그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라자로가 살아난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몇 년 더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요.

더 살아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있고, 더 나쁜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 살고, 덜 살고, 어느 쪽이 더 의미 있는 일인지는 속단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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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는 예수님께 라자로를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기 전에 오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라자로는 죽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마르타처럼 믿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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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책의 '오늘의 묵상'에 대해서 다시 시비를 걸어야겠습니다.

그 글을 보면 마르타가 예수님께 '투정과 협박이 뒤섞인 청원'을 했다고 해설해 놓았습니다.

'투정'은 그렇다치고 '협박'이라니...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마르타가 예수님을 협박했다니, 이건 망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해설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성경에 억지로 짜맞춘 것입니다.

 

좀 더 읽어보면 사람들이 '엄청난 협박성 기도'를 하고 있다고 적어놓았습니다.

그건 사제로서 할 말이 아닙니다.

본당신부로 조금만 살아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절박한 상황에서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가 '협박'으로 보입니까?

저는 어떤 신자도 '협박성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들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한 기도를 할 뿐입니다.

본당신부라면 그 절실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같이 울어줄 수 있어야 하고, 같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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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글쓴이 : Fr 송영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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