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 백성의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그들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복음 루카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종이학을 접었다. 날씬하게 잘 접었다. 그런데 누가 접은 거냐고 물으면 내가 접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내가 접은 것은 없다. 내가 접은 종이학도 나 혼자 접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에 물을 뿌렸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를 베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로 종이를 만들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종이를 나에게 가져다줬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다. 천 번을 접는다 해도 나 혼자 접은 종이학은 없다. 내 손을 잠시 만난 종이학이 있을 뿐.”(정철, ‘행복한 동행’중에서)
자기가 접은 종이학이지만 결국은 내 손을 잠시 만난 종이학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바로 나도 모를 다른 이의 도움이 있었기에 한 마리의 종이학을 접을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내 손을 통한 것은 무엇이든 내가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저작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지요. 그러나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그 창작물이 과연 자신의 순수한 힘으로 만든 것일까요? 하느님의 이끄심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저만이라도 제 글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사람들에게 선언을 했지요. 왜냐하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어떤 저작권도 주장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감히 하느님도 하지 않는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각종 욕심으로 인해서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는 불경은 피해야 합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에 대해서 떠올려 봅시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권리를 큰소리치며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내 자식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멋대로 성전에 머물면서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었던 예수님을 혼내지 않지요. 대신 마음속에 그 모든 일을 간직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오로는 결코 적을 물리칠 수가 없다. 오히려 자신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고 약하게 만들어 버린다.(데일 카네기)
비워야 채워지는 삶(이민홍)
예전엔 몰랐습니다.
비워야 채워지는 삶을 어제보다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고 발버둥만 치는 삶이었습니다.
항상 내일을 보며 살았으니까요
오늘은 늘 욕심으로 채워 항상 욕구불만에
남보다 더 갖고 싶은 생각에 나보다 못 가진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깨닫습니다.
가득 차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현실을..
이제 마음을 비웠습니다.
또 욕심이 찬다면 멀리 갖다가 버리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하다면 조금만 갖겠습니다.
그리고 나누겠습니다.
가식과 허영을 보며 웃음도 지어 보이겠습니다.
내 안의 가득 찬 욕심을 버리니 세상이 넓어 보이고
내가 쥔 게 없으니 지킬 걱정도 없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