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9년 5월 5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도구 Ludovicus
2009. 5. 5. 07:35
제1독서 사도행전 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복음 요한 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국어 시험시간이었습니다. 시험 문제 중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고 해요.
“미닫이를 소리 나는 대로 쓰시오.”
이 문제에 대해서 잘난 척하기로 소문난 형규가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제일 먼저 답안지를 내고 나갔습니다. 형규의 답안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정답: 드르륵
하긴 틀린 말도 아니지요. 미닫이문을 열거나 닫을 때 나는 소리는 ‘드르륵’일 테니까요. 그러나 원래의 답은 그것이 아니겠지요. 문제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정답과 다른 답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당신께서 제시하는 길을 따르는 정답이 아닌 오답을 쫓을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길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말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사실 예수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믿을 수 있도록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즉 표징만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적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요. 어떤 의사도 치유하지 못했던 환자들을 낫게 해주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어쩌지 못했던 마귀들을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다 보니 다 부정적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을 생각하니 도저히 자신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예수님을 인정하기란 더욱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놀라운 기적을 행해도 그것이 모두 마귀의 장난처럼만 보였습니다.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해주셔도, 그것이 하나의 말장난인 것처럼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단지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만 하실 뿐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혹시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정답이 아닌 오답만을 계속하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의란 각자 자기가 할 일을 다하고 타인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플라톤)
아픔만큼 삶은 깊어지고(‘좋은 글’ 중에서)
흐르는 물 고이면 썩어 가듯 움직임이 정지되면 마음엔 잡초가 자라난다.
상처받기 두려워 마음 가두어 놓고 잡초 무성히 키울 바에야 차라리 어울리는 세상에서 속마음 열어 놓고 사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들어야 할 것 듣기 싫고 가지고 있는 것 버리기 싫지만 마음은 한 시간에 머물러도 한 곳에 갇혀 있어도 아니된다.
매서운 바람이 마음 한 구석에 소용돌이를 일으켜 드러난 상처에 생채기를 만든다 하여도
고통이 아픈만큼 줄 수 있는 자람이 있고 교훈이 있기에 마음은 편한 곳에 두어 움직임이 계속되게 해야한다.
물은 흐르기 싫어도 흘러야 하고 흐르는 물은 파도를 만들 듯 마음은 추함이 있어도 열려야 하고 아픔이 있어도 흘러야한다.
마음의 고통은 공기처럼 소중하여 아픈만큼 삶은 깊어지고 자란만큼 삶이 풍성해지고 편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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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평화의 사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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