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터전 /태백지방 공소들
신앙의 터전 / 옛 교우촌과 공소 이야기 206 |
현존 교구 공소 136 태백지방 공소들 4 고(故) 이영섭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1959년 1월 28일, 상동성당 초대주임으로 부임하여 태백지방의 장성ㆍ황지ㆍ철암 공소를 관리하면서 탄광지대 선교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1959년 5월 10일, 황지공소에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첫 미사를 드렸으며, 동년 10월 7일, 장성 계산동 천막에서 40명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장성에 본당을 설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영섭 신부는 1960년 4월 1일, 대한석탄공사 소유 토지에 성당 신축을 착공하고 동년 11월 20일, 120평의 성당과 32평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이영섭 신부는 이 모든 일을 엄지영(베네딕도, 95세. 원동성당 교우. 동성아파트 거주. 엄규환의 부친) 전교회장에게 맡겼다. 엄 회장은 성당이 완공되고, 본당이 설정되자 철암공소에 주재하면서 전교활동을 하였는데 우리는 흔히 이 엄 회장을 이영섭 신부의 전교활동 전위대(前衛隊)라 칭한다. 이영섭 신부는 1961년 8월 12일, 장성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초대주임으로 부임한다. 이 성당의 관할 구역은 삼척군 장성읍, 상장면, 하장면 그리고 경북 봉화군의 대현리, 석포리, 두음리이고, 교세는 장성 152명, 황지 233명, 철암 115명이였다. 장성성당에 부임한 이영섭 신부는 우선적 과제가 황지공소의 강당 부지 매입과 강당 건립이었다. 이 해 9월 20일, 황지동에 공소 강당 부지 1,200평을 매입하였고 10월 3일, 노동자의 수호자 성 요셉에게 강당을 봉헌한 후 10월 25일, 황지공소 강당 신축 공사에 들어가 12월 24일, 강당을 준공하고 25일, 첫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1962년 3월 16일, 대한석탄공사 소유인 장성성당 부지 840평을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영섭 신부는 광산지대를 사목하면서 많은 광부들이 고리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안타까워했고,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음에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영섭 신부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고리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1960년, 부산과 서울에서 조직 운영되고 있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탄광지대에도 도입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부산에 있는 교도원(敎導員)들을 초청하여 신협 소개 교육을 하였고, 마침내 강원도 최초로 1962년 8월 18일, 장성성당에 태백신용협동조합, 철암공소에 요셉신용협동조합, 황지공소에 황지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 신협운동은 조합원들에게 많은 교육을 통해 의식을 고양하여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하며, 복식부기에 의해 투명하게 자금을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끊임없는 반복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임원들의 희생봉사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만해도 부산에서 교도원들이 탄전지대인 태백까지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 신협은 교육 부족과 경험부족으로 창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게 된다. 두 번째로 노동하는 청년들의 의식을 고양하기로 하였다. 한국주교회의에서 정식 평신도사도직 단체로 인준(1960.11.2)을 받아 서울에서 활동 중인 가톨릭노동청년회(J. O. C)를 탄광지대인 장성성당에도 도입하기로 하고, 서울교구 J. O. C 회원들의 도움으로 1962년 10월 17일, 강원도 최초의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4년 4월, 본당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자 대표들이 본당 살림살이를 책임지게 하였다. 이영섭 신부는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가 분리되어 원주교구가 설정되고 6월 29일, 초대교구장에 착좌(着座)한 지학순 주교와 의논하여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성전으로 황지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이듬 해 4월 25일 성당을 기공하였다. 10월 5일, 장성성당을 분리하여 황지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초대주임 민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11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께 성당을 봉헌하였다. -천주교 원주교구 공소사목협의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