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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론15. 한국선교
도구 Ludovicus
2009. 2. 1. 21:17
교회론 15.
한국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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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9년 일본에 천주교가 전파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스페인, 네덜란드와 같은 유럽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하고 무역을 통해 세계정세에 눈을 뜨고 빠르게 국력을 증진시켰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뒤떨어진 나라였는데 이시기에 국력이 우리나라를 추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당쟁으로 자기 당파의 이익만을 챙기는 소집단주의에 눈이 멀었습니다. 국가전체의 국익은 뒷전이고 다들 자기 당의 기득권만 챙기니 점점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은 자기 당의 이익만 챙기기보다 국가와 민족 전체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일본보다 200여년 뒤였습니다. 1. 천진암주어사모임과 이승훈세례 중국을 유일한 대국으로 극진히 섬겨온 조선은 해마다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중국의 비위를 맞추었습니다. 사신일행은 보통 3백 명에서 5백 명을 헤아렸습니다. 이러한 사신일행이 두 달여 동안 북경에 머무르면서 반드시 구경했던 곳 중의 하나가 네 곳의 성당이었습니다. 사신들은 성당에서 신부의 안내를 받고 서양을 소개하는 책들과 천주교교리책인 ‘천주실의’ 등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유학자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교 책들을 보면서 천주교를 서양학문 중에 하나로 생각했고, ‘천주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근데 천주학은 보통학문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주인을 섬기고,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가르치고, 올바르게 살다가 마침내 하늘로 돌아간다는 아주 심오한 학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서양학문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최고급학자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자, 뜻있는 학자들이 연구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학자들은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면 함께 모여서 세미나도 하고, 발표회도 하고 했었습니다. 이 모임을 했던 곳이 바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천진암 주어사라는 암자였습니다. 당시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혹시라도 이상한 서양학문을 한다고 조정에서 뭐라할까봐 조심했었습니다. 당시 모임을 주도했던 사람이 이벽이었습니다. 모임을 계속하면서 한 사람을 뽑아서 중국북경에 보내 보다 자세하게 천주학을 배워오게 하였는데, 이렇게 뽑힌 사람이 이승훈이었습니다. 이승훈은 북경에 가서 3달 교리를 배우고 드디어 영세를 받았습니다. 조선교회의 초석이 되라는 뜻으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때가 1784년이었습니다. 지난 1984년 교황님을 모시고 한국천주교 200주년 행사를 했지요. 이승훈은 많은 책과 십자가와 상본 등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승훈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들의 노력으로 곧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이벽은 조선에서 구세주 오시는 길을 준비했다는 의미로 세례자요한을, 권일신은 복음전파에 헌신하는 의미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본명을 택했습니다. 이벽, 이승훈, 권일신 이 세 사람이 조선천주교회의 실질적인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벽이 으뜸이었습니다. 이어서 경기도 양평의 권철신이 입교하였고, 계속해서 경기도 광주에 살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형제가 입교하였습니다. 충청도 아산의 내포에 살던 학자 이단원도 찾아와 입교하였고, 홍낙민, 최인길, 지황, 최창현, 김범우, 전라도의 유항검 등 주로 양반 및 중인 계급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784년부터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지금의 명동성당자리인 김범우의 집을 성당으로 삼아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2. 초기 신자들의 집회와 최초 박해 김범우의 집에서 갖던 집회는 점점 수십 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설교하고, 이승훈, 권일신과 정약전, 약종, 약용 등 3형제가 좌우에 앉아있었습니다. 이 집회는 점점 소문이 나게 되어 형조의 금리가 이것이 술마시고 도박하는 것이라 의심하고 덮치게 되었는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어서 모두 형조로 연행하고, 십자가 등의 물건들도 압수하게 되었습니다. 형조판서가 이들을 심문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명문대가출신의 학자들임을 알고 놀라 타일러서 석방하고, 그 가운데 중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배교를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김범우는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키자, 형조판서는 그를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김범우는 거기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김범우는 조선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벽과 이승훈은 천주교의 두목이요 선동자로 지목되어 집안과 친척들로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그의 가족들로부터 계속 박해를 받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천주교서적을 불태우고 천주교를 그만 둘 것을 약속하고, 자신이 천주교신자이었음을 사람들 앞에 반성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벽도 집안에서 갖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목을 매달았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이벽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 자기 신앙을 감추었습니다. 집안은 그를 일체 천주교와 접촉할 수 없도록 감금하였습니다. 이벽은 이후 심한 자책감으로 말을 하지 않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식욕도 없이 지내다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3. 가짜성직제도 그런 중에서도 신자들은 교회조직을 만들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아직 사제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때여서 자기들끼리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자들은 천주교가 주교와 사제를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알고 책을 참고해서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주교와 신부로 뽑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지위와 학식, 덕망이 가장 뛰어났던 권일신이 주교로 추대되었고,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이 신부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출된 주교와 신부들은 각자 자기 임지를 정해서 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면서 세례도 주고, 고해성사도 주고, 미사도 드리고, 신자들을 관리하는 행정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짜 주교와 신부들이 준 영세는 유효했지만 다른 성사들은 무효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들이 당시 천주교인들에 열심을 불러일으키고, 전국적으로 신앙을 전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미사를 드릴 때는 금잔을 사용했고, 제의는 중국비단으로 화려하게 해 입었는데, 그 모양은 제사드릴 때 입는 옷과 비슷했습니다. 신부들은 신부관을 만들어 썼습니다. 고해성사는 단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신부가 앉고, 신자는 그 밑에 서서 보았습니다. 요새는 보속이 주로 기도를 하라는 것이지만, 그때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잘못에 대한 벌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던 풍습 안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집안에서는 잘못한 아이에게 부모가 종아리를 때렸고, 서당에서는 훈장이 아이의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문제는 여자들, 특히 부인들이었습니다. 초기교회 신자들은 주로 양반층, 사대부집안이었습니다. 적어도 글을 읽을 줄 알고, 사회의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이 신식학문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기교회신자들은 당대최고의 학자들이거나 큰 양반집 가족들이 많았습니다. 이 귀하신 양반집 내당마님들이 아무리 신부라 하지만 남정네 앞에서 치마를 걷어 부치고 속살을 내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부인들이 외출할 때 누군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때였습니다. 외교인들이 이걸 알면 천주교신자들은 도데체가 삼강오륜도 법도도 없는 호로자식으로 감옥에 가야 마땅했습니다. 이런 유교사회분위기,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자마님들은 치마를 걷어 부치고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이것이 그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은 이것저것 따지고 자시고하는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뒷받침해줄 여건도 없었습니다. 교리를 제대로 배울 수도 없었고, 성서도 없었습니다. 레지오도, 꾸르실료도, 신부도 수녀도 없었습니다. 그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천주님이 계시고,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거기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가짜 성직제도는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 2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근데 교회서적들을 더욱 더 자세히 연구하다보니 주교와 신부들은 자기들의 선출과 직무가 유효한 것인지 의심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열고 즉시 일체의 성무수행을 중지하고 북경주교님께 문의하는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신자들 앞에서 주교와 신부로 행세하다가 그 직책을 버린다는 것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신앙의 열성으로 주교와 신부들은 일단 그 직책을 버리고 즉시 평신도 자리로 돌아갔고,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북경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서울에서 북경까지 삼천리가 넘는 길, 육로로 석 달이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이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 윤유일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북경주교님 답장이 왔습니다. 북경주교님은 그들이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사를 거행할 수 없고 영세 말고 다른 성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을 가르치고 미신자들을 입교시켰던 온갖 노력을 격려하였습니다. 주교님의 이 편지는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졌고, 가짜 주교와 신부들은 성직수행을 즉시 중단했던 결단을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교우들은 성사를 받을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게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답신을 가져왔던 윤유일은 북경에서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였습니다. 성당이며, 서양신부며, 미사와 성사 등의 이야기에 흥분한 신자들은 드디어 북경주교님께 신부님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조선에 오게 된 신부가 중국인 주문모신부였고, 주신부님은 5년 넘게 조선천주교회를 위해 헌신하시다가 순교하시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조선천주교회는 100년 동안 모진 박해를 받고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습니다. 1886년, 조선은 마침내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 장하신 한국순교자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장하신 한국순교자들이시여, 우리나라를 위해 빌어주소서. . 아멘.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마태오16,24- -대구 대교구 교구청 사목기획실장 전광진 (엘마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