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여러분, 6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7 저 첫째 계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0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1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복음 마르 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저에게는 E-Mail이 참으로 많이 옵니다. 새벽마다 쓰는 새벽 묵상 글에 대한 감사 글부터 신앙 상담의 글, 또한 교리나 성경에 대한 질문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몸이 하나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컴퓨터 앞을 하루 종일 지키는 것도 아니고요. 따라서 때로는 바빠서 답장을 써야 겠다 하면서 뒤로 미루다가 결국 답장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E-Mail 답장은 받은 즉시 해야 감응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에 하지 뭐, 시간나면 하지 뭐.. 이런 식의 마음 때문에 감응을 잃어버려서 답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E-Mail을 받고 곧바로 답장을 했을 때는 어떤가요? 그 상대방과 소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또한 저 스스로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매 순간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뜨거운 감응을 갖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하지 뭐, 나중에 시간나면 하지 뭐...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주님께 답장을 드리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렇게 미루고 미루면, 결국 처음에 느꼈던 감응이 사라져서 결국은 주님과 아무런 관계도 아닌 것이 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를 절대로 내치시지 않습니다. 마치 E-Mail 교류를 통해 점점 친분이 쌓이는 것처럼, 주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수록 친분이 점점 쌓여져서 매순간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산은 성경에서 거룩한 곳, 거룩한 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해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게 하고, 예수님의 사명인 복음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처럼 지금 우리들에게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고 당신의 사명인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우리들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곧바로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지요? 혹시 다음에 하지 뭐, 나중에 시간나면 하지 뭐..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늘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나이도 들만큼 들었으니 그만 쉬어도 되지 않겠어요?”라고 권고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결승점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그만 멈추어야 하겠는가?”
이렇게 끊임없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타협과 안일한 마음으로 대충대충 살아간다면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불충한 제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승점이 가까워졌으니 더욱 더 힘내어 그 결승점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계속 페달을 밝는 한 당신은 넘어질 염려가 없다.(클리우드 페페)
로또의 가르침(정철, ‘행복한 동행’ 중에서)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로또를 사러 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것을 아십니까? 압니다.
그런데 왜 로또를 사십니까? 제 인생은 실패를 몰랐습니다. 그게 오히려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패배하는 법, 좌절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걸 돈을 버려 가면서까지 꼭 배워야 합니까? 돈을 버려 인생을 배울 수 있다면, 그 돈은 그걸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을 대하는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그래서 패배하는 법, 좌절하는 법을 다 배우셨습니까? 다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