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러분,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루카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 위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대 위의 나를 스포트라이트가 환히 비추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대에서 잘 연기할 수 있도록, 그래서 멋진 모습들을 잘 보이게끔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무대 위에서 객석을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까만 점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객석에 아무도 없는 것일까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전혀 없는 것처럼 까만 점으로만 보이는 객석이지만, 약간의 소리도 들리고 또한 인기척을 통해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까만 점을 향해서 무대 위의 배우들은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주님이 보이십니까? 그래서 당신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실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또한 멋진 모습들을 잘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환하게 비춰주실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환하게 비춰만 주다 보니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각종 성사를 통해서 또한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그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계시는 주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예수님께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 그래서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나병에 걸린 이 사람은 예수님께 이러한 말씀을 던지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시지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이 되어라.”
그리고 실제로 이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잘 살 수 있도록 환하게 비춰만 주시는 주님이기에 그 때문에 오히려 주님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모습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거두는 순간, 주님과 멀어지게 되어 더욱 더 이 세상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비추어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야 어둠 속에 계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소유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공간과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멜라니 게이슬리)
즐겁다면 이미 성공한 거야
소년의 꿈은 파가니니와 같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바이올린 연습을 하면서 행복해했지만 실력은 여간해서 늘지 않았다. 그의 부모도 아이가 음악적 자질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느 날 소년은 바이올린 교습을 하는 선생님을 찾아가 자신의 능력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이 연주하고 싶은 곡을 선택하라고 하자 소년은 파가니니의 스물네 곡의 연습곡 가운데 제3번을 골랐다. 소년의 연주 실력은 형편무인지경이었다. 하도 많이 틀리는 바람에 듣기가 괴로울 정도였던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선생님이 물었다. “너는 왜 바이올린을 좋아하니?”
“저는 성공하고 싶어요. 파가니니처럼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가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 “너는 정말로 즐겁니?”
“저는 아주 즐거워요.”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소년을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얘야, 네가 정말로 즐겁다면 이미 성공한 거야. 그런데 왜 파가니니처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니? 내 생각으로는 즐거움 자체가 성공이란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소년은 즐거움은 세상에서 비용이 가장 적게 들면서도 위험이 없는 성공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소년은 자신이 바이올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바이올린 연주를 즐겼다. 그리고 더 이상 파가니니가 되겠다는 몽상을 하지 않았다. 이 소년이 바로 앨버트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평생 동안 바이올린을 좋아했지만 연주 실력은 대단치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바이올린을 켤 대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는 사실이다.